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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동의 경제활동과 사회조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4005
한자 老衡洞-經濟活動-社會組織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집필자 김동윤

경제활동, 생업

예전에는 중산간촌이었으므로 주로 도보로 성안(제주 시내)이나 이웃 마을에 다녔는데, 지금은 노형 로터리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현대화된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제주시 서부 지역 교통 중심지로 달라졌고 아파트 단지들이 조성되면서 많은 기관과 상가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산업경제도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밭농사

해방 전후 우리 마을은 주로 밭농사를 짓는 농경사회였다. 보리, 조, 밀, 모멀(메밀), 콩, (팥), 산디(산도, 山稻), 면화(목화), 유채, 고구마, 마늘 등을 주로 재배하여 자급자족의 경제 생활을 하였다. 보리 경작에는 겉보리(쌀보리가 나오기 전 비료없이 경작할 때), 먹보리(일제 말기), 맥주보리(일제 말기), 쌀보리(비료 이용 후), 조 경작에는 맛시리, 고시리, 청돌와리, 쇠머리시리(쇠머리 모양의 흐린조), 강돌와리(모인조), 개발시리(개발모양의 흐린조), 대국조(고고리가 큰 모인조), 콩 경작에는 청태콩(알이 푸름), 머드레콩(알이 굵음), 돔비, 칠월대, 팔월대, 줄자리(현재 콩나물용 콩), 나이롱콩이 있고, 백천·산디(山稻) 등의 밭벼 경작에는 강나룩(검은색 벼), 원산디(노란색 벼), 되수리, 차산디를 경작했으며, 팥과 녹두에는 붉은, 흰, 눈쾡이, 옹눈이 녹두를, 깨 경작에는 살깨(가지를 많이 쳐서 수확량이 좋았고 알은 검은색, 흰색의 2종이 있었음), 덧붙이깨(열매 맺는 깍지 부분이 덧붙어 수확량이 좋음), 팔각깨 40일종과 80일종을 재배하였다. 대죽(수수 일종) 재배에는 빗대죽(빗자루용), 오동대죽(알맹이를 이용하여 떡을 만듦), 사탕대죽(사탕수수), 쌀대죽(쌀 대용품), 강낭대죽(옥수수) 등을 재배하여 식생활에 이용하였다. 그 외로 목장밭에는 피를, 밭담 구석(머드레)에는 강낭콩이나 대죽, 호박 등을 심어 조그만 공간도 지혜롭게 활용하였다.

재배 방법으로는 오늘날과는 달리 비료가 없던 때였으므로 주로 윤작 형태였다. 농사를 여러 번 지어 땅에 기름기가 없어지면 밭을 놀린다. 즉 농사를 짓지 않고 잡풀이 나서 땅이 회생하게끔 놓아두었다가 4, 5년 후에 다시 새밭지→새밭→촐왓→경작지 형태로 윤작되는 형태가 보통이었다. 그러던 것이 퇴비 비료의 도입으로 가까운 거리의 공간에서 경작하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전환되었다.

노형의 경작지는 옛날에는 어승생 앞까지 이용되다가 일제 말기부터 축산단지 이하 지경으로 그 범위가 좁아졌다. 밭농사에는 일손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김매기, 작물베기, 조밟기 등에는 이웃이 서로 협동하는 수눌음과 케왓계전(契田) 등이 유행하였다. 봄에 파종하는 작물로는 깨, 산디, 여름에는 조, 콩, 팥, 대죽, 고구마, 메밀 등이 있고 늦가을에는 보리 씨앗을 뿌렸다.

축산업

우리 마을인 경우 축산업은 마을마다 대개 비슷한 양상이었다. 해방 이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가축 중에서 주로 소와 말을 사육했는데, 농사용, 퇴비용, 가정 경제 해결용, 교통수단용, 육용 등에 이용하기 위하여 소와 말의 사육은 필수적이었다. 소인 경우 1가정에 3두 정도를 보편적으로 사용했으며 이를 위한 품앗이로 소번(우번·牛番)은 마을민의 중요한 일상사였다. 암소번은 대체로 번당 50두(송아지 포함)씩 5개 번이 편성되었고, 부룽이(종우·種牛)번은 번 당 20두 정도해서 5개 번으로 구성하였다.

따라서 번은 목장에 소들이 올라가기 전 봄철에 많이 행해졌으며 소들이 목장에 올라가 방목하는 여름철에도 유사하게 서로 돌아가면서 관리하였다. 농번기에는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서 방목중인 소를 몰아다가 부렸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소의 사육은 교통과 생산을 위한 산업 경제의 토대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업적으로 대대적인 축산을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점은 아쉬운 일면이나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말은 1가정에 1~2필 정도는 있었다. 특히 *ㅣ(자마·雌馬)를 사육하는 가정은 많았으나 *웅ㅣ(웅마·雄馬)를 키우는 가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꼭 말을 키워야 하는 까닭도 있었는데 이는 곡식의 정미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정미(精米)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방아(연자마·硏子磨)를 돌려야 했는데 이를 돌리려면 특징상 소보다 말이 더욱 필요했다. 이웃의 말을 항상 빌어 쓰는 것은 부담되는 일이어서 가능하면 1필 정도는 소유하고 있어야 필요시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자매를 먼저 차지하기 위하여 표돌리기, 빗자루 놓아두기, 팍 놓아두기 등의 방법을 행했다니 당시의 실정을 실감할 수 있다. 말테(마번 馬番)는 1개의 번에 20~30필로 편성했는데, 서가름번, 알가름번, 못가름번, 빌렛가름번, 동가름번 등 이웃하는 집들끼리 번을 나누어 운영했다. 밤에는 방아를 찧기 위하여 방목중인 말을 내려다가 보호했다. 말을 보살피는 목동을 테우리(말테우리)라고 했다.

말을 키우는 방법을 찾아보면, 자매를 기르는 사람들은 조밭 밟을 때만 내려다가 부리고 일 년 내내 산에 올려 방목하면서 한 달에 1회 정도 돌아보면서 키웠다. 웅매는 비교적 잘 사는 집에서 키울 정도로 희귀성이 있었고, 자매를 따라 다녀 잃기 쉬웠기 때문에 매거서 에워서 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웅매의 용도로는 타고 다니기, 짐 운반, 마차끌기 등이었다. 당시에는 말 2필 정도만 기르면 용돈 조달, 학비 마련에 별 염려가 없었을 정도로 매우 소중한 경제 수단의 바탕이었다.

쇳번이나 말번의 장소로는, 한식(4월 5일경)이 지나면 진군지(군대의 진이 있었다는 곳으로 지금의 제주관광산업고 서쪽 지경), 고냉이동산(천마목장 북쪽), 하잣지경(천마목장 부근), 노리소니오름(천마목장 남쪽), 도새기동산(노리소니오름 서쪽) 등을 주로 이용하여 계절의 변화와 풀의 생장 속도 및 현상을 보아가면서 차츰차츰 먹이면서 올라가다가 여름철이 되어 목장에 풀이 잘 자라 있으면 암소나 *뫼는 올려 방목하였다. *웅뫼는 가정에서 가냥(관리)하였고, 부룽이(숫소)는 도새기케왓(노리소리오름 남쪽)이나 아시내밭(충혼묘지 터) 등에 울타리를 만들어 밤에는 에워서 키우고 낮에는 풀을 놓아 번(番) 차례에 따라 돌아가면서 관찰, 확인하는 방법으로 돌보았다.

방목하는 소는 상산(上山)[골머리-백록담 밑]에 방목했다. 방목의 장소로는 월랑이나 정존의 경우는 골머리 부근을, 광평인 경우는 한라산 동북쪽의 큰드레나 장구목 너머에 있는 왕정서들 알녘 도트멍밭을 이용했는데 이 곳을 오라리·이호·도두·연동민들도 함께 활용했으며, 광평이나 월산인 경우는 어스승 서녘의 서평밭 만세동산 주변을 이용하여 한라산 밑에서부터 어스승(어승생) 앞 웃중장을 이용했고 알중장에서도 방목했다. 그래서 마소를 보러 가는 날이면 아침 첫 닭이 울면 서둘러 출발해야만 했다. 4·3사건 이후에는 가정의 마소들이 거의 죽어버렸기 때문에 마을에선 1~2마리도 매우 소중한 시기가 되었었다. 이처럼 우리 마을에서 축산업은 매우 긴요한 산업 경제 분야였는데 시대의 변화와 마을 목장의 매매 및 기업화 경향 등으로 약화되어 오늘날에는 흔적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노형 향우회

1950년 3월 17일 제주시 성내에 거주하는 노형리 출신 향우들의 향리 재건에 협조하기 위하여 향우회를 조직할 것을 발기하고 제주경찰서장으로부터 집회 허가를 받음. 발기인은 김경석, 현일호, 문규석, 김효진, 문경화, 김창준, 김형식, 현호상, 김태길, 현광호, 양기상, 현학용, 현희형, 현창훈, 현용탁, 강상교이다. 장학 사업 및 기타 활동은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기 위하여 경조사 때 상부상조하며, 향리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각종 마을 행사에 참가하여 격려하고, 노형초등학교 졸업생 중 모범생을 선청하여 매년 향토상을 수여하고 있다. 본 향우회의 주된 활동의 하나로 장학사업을 들 수 있는데 노형동 출신 부모를 둔 고등학생 중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단정한 학생을 선발하여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노형 교우회

노형 교우회는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상부상조함은 물론 교육 정보를 교환하고 연수 및 연구 활동을 통하여 교육의 전문성을 높이고 교우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향리 교육 발전에 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요 사업으로는, ① 퇴직자 회원에 대한 기념패 증정(상부상조), ② 노형지 발간(1996년) (향리 교육 발전을 위한 사업), ③ 노형초등학교 체육대회 격려금 (향리 교육 발전을 위한 사업), ④ 노형초등학교 졸업식 때 교우회 회장 상장 전달(장학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노형 행우회

본 회는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매 분기별 이사회를 개최하여 행우회의 단합과 향리 발전은 물론 후진 양성을 위하여 노형인으로서 한마음 한뜻으로 결집력을 가짐은 물론 회원 경조사시 상호간의 힘을 바탕으로 결속을 다지는 사업과 또한 고향 출신 원로를 초빙 마을의 유래 및 향우회의 적극적인 협조로 사기를 진작시키고 있는 한편 연중 1회 이상 야유회를 실시하여 회원과 가족의 화합과 우의를 도모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앞으로는 기관별 분회(5개 기관)를 활성화시켜 직장별 분회 조직을 통하여 행우회의 위상과 공직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데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추진하고 있음.

정존 장학 친목회

설립 배경은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이 불길처럼 번지는 가운데, 극일은 곧 배움이란 자각이 일면서, 우리 동네 정존·함박이굴·방일이에 거주하던 뜻있는 어르신들이,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오로지 후진들을 가르쳐야 되겠다는 일념에서 함박이굴 학당을 개설하고1930년대 초부터 희망하는 남녀 수강생들에게 초등학교 과정의 학습을 야학으로 간간이 가르치며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해방과 함께 함박이굴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 文斗潗, 총무이사 梁龍淑, 이사 文斗泂·梁信彬·梁鳳祥 제 어르신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는 과정에서, 양봉상 씨는 처음 설립 과정에는 합류되지 않았으나, 당시 읍내에서 代書士 일을 보고 있어 관공서 출입이나 허가 조건 서류 구비 등에 밝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광평마을에 속하면서도 재단이사에 포함시켰다.

재원 확보를 일환으로 땔나무 외에는 난방 연료의 대안이 없던 당시 사정으로 속칭 ‘노가리머생이’ 임야 749평을 구입, 연명으로 이전·등기하고, 이 소나무밭에서 가지치기와 솎음으로 겨울철 난방용 땔감을 학교에 공급해 오던 중 4·3사건으로 학교가 소실되고, 어르신들이 운명을 달리하게 됨에 따라 정존마을 재건 후 1950년 초부터 마을 성곽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 모두가 해마다 가지치기와 풀베기 작업 등으로 공동 관리해 왔고, 속칭 ‘황굴왓’ 임야 258평은 일제시대부터 임자없는 자투리땅을 마을 어른 중 강윤표(姜允杓) 씨 외 2인 명의로 이전 등기하여 역시 공동으로 관리해 오던 중 80년대 중반 부동산 상승 붐이 일면서 토지명의 후손들이 사유화할 우려가 있어, 마을에서 차제에 이를 매각하여 옛 어르신들의 소망 사항이던 장학사업을 펼치는 것이 현명한 조치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후손들의 양해하에 ‘가칭 정존친목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주된 사업 내용으로는 복지 및 상부상조 사업이다. 이를 위해 재원 확보 차원에서 미루어 오던 복지사업을 1996년도부터 점차 확대하여 봄, 가을 연중 두 차례, 만 60세 이상 회원과 회원 가족을 도내 일일관광 내지 야유회 등으로 경로잔치를 계획하고, 1996년 5월 19일 일일관광 여행 겸 야유회 행사를 실시했다. 그 외로 경조사에는 상부상조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2000년 9월 말 노형동개발위원회가 폐지되어 2000년 10월부터 노형동 주민자치위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노형동 주민자치위원회

위원회의 주요 기능 및 역할로는 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 개발·운영 및 시설관리, 지역문화 행사, 전시회, 생활체육 프로그램 개발 및 지원, 불법 쓰레기, 주정차 질서 등 기초 질서 지키기 운동 전개를 한다. 또한 소외된 저소득층, 소년소녀가장, 모부자가정 지원 및 불우이웃돕기 사업을 전개하며, 야간 방범활동 및 청소년지도 등 주민 생활안정 운동을 전개를 하여 안전한 마을 만들기에 주력을 하고 기타 활동은 동발전 현안 사항 및 주민 편의 시책 협의 추진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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