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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2126
한자 漂到人
분야 역사/전통시대
유형 개념용어/개념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전

[정의]

조선 시대 외국에서 항해 나왔다가 잘못되어 제주에 떠밀려 온 사람.

[개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바다에 의지하고 살던 제주에서의 삶은 바람을 따라 파도에 쓸려 떠가기도 하고 떠밀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바람과 파도에 휩쓸려 원래의 목적지와는 다른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같지만 경로에 따라 부르는 명칭에 차이가 있었다. 표도인은 외국 사람들이 항해 중에 바람 등을 잘못 만나 제주에 떠밀려온 경우이고, 표류인은 제주 사람이 다른 지역으로 떠밀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경우를 말한다.

다른 곳에서 표류하여 제주에 도착한 이야기는 제주의 신화와 전설 등 역사와 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제주 최초의 왕국인 탐라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세 공주는 푸른 바다 너머에서 오곡과 가축을 가지고 돌함을 타고 표류해온다. 세 공주는 세 신인(神人)과 혼인하여 비옥한 곳에 거처를 정하고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른다. 세 신인이 솟아났다는 모흥혈은 지금의 제주시 이도동에 있는 제주 삼성혈이고, 혼인하여 거주하였다는 제일도·제이도·제삼도는 지금의 제주시 일도동·이도동·삼도동으로 제주시의 중심지이다.

영등신[영등 할망]은 해마다 먼 바다로부터 제주를 찾아오는 바람의 신인데 제주에서는 풍농신(豐農神)으로 여겨진다. 영등 할망은 제주 앞바다 어디쯤의 외눈박이 섬에서 찾아온다고도 하고 강남천지국에서 들어온다고도 한다. 영등 할망이 어디에 살든 음력 2월 초에 제주로 들어와서 그 달 15일경 제주를 떠난다.

이렇듯 바닷길인 해류를 타고 오가는 동안 삶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신화 전설의 뿌리가 되었다.

[조선시대 표도인 실태]

1. 제주에 표도한 중국인

1652년(효종 3)에 묘진실과 1667년(현종 8) 임인관은 명나라의 유민으로서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우리 조정에서는 청나라가 트집 잡을 것을 염려하여 청으로 돌려보냈다.

또 1692년(숙종 18) 설자천은 3년 전인 1689년 안남에 표류되었던 김대황을 데려온 자로서, 그때 조정에서 베푼 은혜에 사은하기 위해 왔노라고 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사사로운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음을 알려 그대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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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표도했던 중국인

2. 제주에 표도한 일본인

1478년(성종 9)에 묘무와 1497년(연산군 3)에 수 명은 명나라로 가던 사신들이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국사(國使)의 예우를 다하여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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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표도했던 일본인

3. 제주에 표도한 유구인과 안남인

유구인들이 제주에 표도하면 본인들의 소망에 따라 노자를 주어 중국이나 일본을 경유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① 1611년(광해군 3) 3월 안남국의 왕자가 제주에 표도하였으나, 제주 관원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 왕자는 1609년(광해군 원년) 왜구에 의해 안남 국왕이 납치되어 억류되고 있었으므로, 부왕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는 상선에 편승하였다가 풍파를 만나 표도한 것이었다. 배에는 황견사 150석과 명주 마노 1,100개가 있었다. 판관 문희현은 이를 탐내고 목사 이기빈을 충동질하여 이들을 살해해버렸다. 이 사실이 탄로나자 이기빈은 북청(北靑)으로, 문희현은 북도(北道)로 유배되었다.

속설에 의하면 안남 왕자는 부왕의 구명품(救命品)으로 주천석(酒泉石 : 물을 넣어두면 술이 된다는 돌)과 만산장(慢山帳: 펼치면 산이라도 덮을 만하나 거두면 손 안에 드는 장막)을 가지고 있었다. 문희현이 이를 요구하자 왕자가 이를 바다에 던져 버렸고, 급기야 이들을 죽였다.

② 1809년(순조 9) 유구국의 순견관 옹세황 등이 우도에 표도하였다. 그는 유구국의 섬들을 순시하다가 바람을 만나 표도하였다고 하므로, 배를 수리해주고 식량과 의복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외에도 1801년(순조 원년) 대정현에 다른 나라 사람 5명이 표도하였다. 말이 통하지 않아 중국으로 이송하였지만, 그곳에서도 모른다고 하여 되돌려왔다. 1809년(순조 9년)에 표도한 유구인에 의하여 비로소 필리핀 사람임을 알았으나, 송환할 길이 없었으므로, 이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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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표도했던 기타 국가 사람들

4. 제주에 표도한 서양인

① 1627년(인조 5) 9월 네덜란드 뱃사람 얀 얀세 윌데브리(Jan Janse Weltevree)가 제주에 상륙하였다. 그는 오우웨르 케르크(Quwer Kerck)호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길이었는데, 물을 얻기 위하여 선원 2명과 함께 작은 배로 상륙하였다가 관헌들에게 잡혔다.

그 사이에 모선(母船)은 떠나버렸고, 3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병자호란 때 출전하였다가 그중 2명은 전사하고 박연만 살아남았다. 하멜(Hamel Hendrik) 등이 제주에 표도하자, 다시 제주로 내려와서 통역하고 서울로 호송하여 갔으며 하멜이 고감군오에 소속되자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의 풍속을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중국에서 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과 사용법을 우리 군인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귀화하여 박연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졌으며, 우리나라 여자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② 1653(효종 4) 8월 야흐트(Jacht)호가 큰 바람으로 대정현 남쪽 해안의 곶(串)에서 파선되었다. 이원진 목사는 대정 현감 권극중과 제주 판관 노정을 시켜 살펴보도록 했는데, 64명 중 36명만이 살아 있었다. 그들은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줄 것을 원했지만, 이듬해 5월에 서울로 압송되고, 여수·순천·남원 등지에 분산·수용되었다.

그중 하멜 등이 8명은 1666년(현종 7) 우리나라를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그해 7월 본국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돌아간 뒤에 우리나라에 억류되었던 14년간의 체험을 기록하였는데, 『하멜 표류기』[화란배 제주도 난파기]이다.

[의의 및 평가]

오늘날과 같이 선박과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표도인을 통한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보는 국가의 입장에서 매우 유용하기도 하였다. 공식적인 국가의 외교 사절단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의 이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표류를 통한 것이었다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 김봉옥, 『제주통사』(세림, 2000)
  • 『제주도지』 2(제주도, 2006)
  • 고창석, 「대외교류와 해양사」(『한국의 해양문화:제주 해역』, 해양수산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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