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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전략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593
한자 濟州四三戰略村
영어음역 Jeju 4·3 Jeollakchon
영어의미역 Jeju Uprising Strategy Village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은희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의 한 과정으로서 주민들을 한 곳으로 소개시켰던 곳.

[개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과 우익 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 및 독립, 반미 구국 투쟁을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정부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발포했다. 정부군은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제주도 해안 마을에 제주 4·3 전략촌을 구축하고,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민들을 가둬놓은 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통제했다.

[형성]

제주 4·3사건 진압 과정에서 형성된 제주 4·3 전략촌은 ‘선량한 양민’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을 집단 부락에 수용하고, 그 외는 싹쓸이하기 위한 정부군의 선택이었다. 집단 부락 내 주민들은 신분을 보장하는 양민증을 발급받고, 무장대의 공격을 차단할 목적으로 성담 쌓기에 총동원되었으며, 밤낮으로 마을을 지키는 업무에 시달렸다.

제주 4·3 전략촌의 구축은 제주 4·3사건을 해결하는 데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정부는 제주도민을 전략촌 안으로 몰아넣은 뒤 단기간에 토끼몰이식 소탕 작전을 실시하여 사실상 무장대 토벌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성격]

제주 4·3 전략촌은 당시 제주도민들의 삶을 조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의 일환으로 조성된 ‘전략촌’에서는 형무소 생활 이상의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졌다. 고향땅을 잃은 주민들은 식량난으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돼지 움막보다 못한 함바집에서 짐승 같은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비위생적인 생활로 인하여 아사나 집단 병사하는 이들이 속출했고, 전략촌 생활로 인하여 농지가 황폐화되는 등 피해가 막대하였다. 게다가 수천 년 동안 이어왔던 제주의 자연 마을 구조도 변모시켰다. 일부의 마을은 잃어버린 마을로, 일부의 마을은 정부 진압 부대가 구획한 획일적 형태의 전략촌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제주 4·3 전략촌을 통해 당시의 생활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4·3 사건의 아픔을 재현하는 일인 동시에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 상태로의 공동체 의식 복원과 제주인의 정체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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