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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간첩 침투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0856
한자 楸子島間諜浸透事件
영어음역 Chujado Gancheop Chimtu Sageon
영어의미역 Chujado NK Agents Infiltration Incid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침투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74년 5월 2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74년 5월 2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상추자도 해안지도보기

[정의]

1974년 5월 20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속한 추자도에 무장 간첩단이 침투한 사건.

[역사적 배경]

제주도민들은 1973년 3월 4일 새벽 우도에 무장간첩 2~3명이 출현하여 해초건조장 경비원에게 총격을 가한 뒤 도주함으로써 북한 무장 간첩의 만행에 치를 떨고 있었다. 도민들은 우도 간첩 침투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오래 전부터 우도 등에 고정 간첩망 9명이 암약해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더욱 충격을 감추지 못하였다.

1974년 북한 인민군은 경상남도 해안과 경상북도 영덕 해안에 각각 무장간첩을 침투시키는 등 취약 도서 및 해안 지역에 대한 무장 간첩 침투에 혈안이 되어 중계 거점을 구축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던 상황이었다.

[발단]

1974년 5월 20일 밤 11시 즈음 북한 무장 간첩 3명이 해안선을 따라 상추자도로 접근하여 상륙을 시도하려 하자 해안 경비 중이었던 남한 측 경비원이 “누구냐?” “손들어!”하고 수하를 했다. 그러나 북한 무장 간첩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무차별하게 총격을 난사했다.

[경과]

무장 간첩들이 출현했다는 긴급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및 예비군들이 반격을 개시함으로써 일대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무장 간첩들은 도주하면서 주택가 등 아무 곳에나 마구 총구를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우리 군경은 달아나는 무장 간첩을 끈질기게 추격하며 계속 교전을 벌였는데, 얼마 후 무장 간첩 1명이 우리 측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무장 간첩 2명은 야음을 틈타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결과]

간첩과의 교전에서 남한 측은 경찰관과 면 직원 각각 한 명, 방위 소집자 두 명 등 모두 4명이 전사했으며 3명이 부상당했으나 무장 간첩의 피해에 비해 아군의 피해가 컸다.

무장 간첩들은 수류탄, 총기, 무전기 등을 대량 휴대하고 있었는데, 아군은 사살된 한 명의 무장 간첩으로부터 북한제 권총, 수류탄, 무전기, 칼, 위조 주민등록증, 현금 10만 원 등을 노획했다.

대간첩대책본부는 추자도 간첩 침투에 있어서 주민들이 신속히 신고해 주고 경찰과 예비군, 면 직원 등 주민 전체가 혼연일체로 간첩 소탕 작전을 지원해 준 데 대해 높이 치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주도민 전체는 인민군의 도발에 또 다시 울분을 터트리며 반공 의식을 더욱 굳게 다져나갈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제주도 방위협의회는 5월 24일 오전 제주농업고등학교 교정에서 추자도 대간첩작전 전사자 합동위령제와 인민군만행규탄 제주도민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제주도민 궐기대회에서는 무려 1만여 도민들이 참가하여 전사한 영령들의 넋을 추도하고 인민군의 침략 근성 포기와 5천만 겨레 앞에 속죄할 것을 촉구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전사한 영령들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이 수여되었다.

위령제에 참가하지 못한 도민들은 오전 10시 제주 전역에 울려 퍼진 사이렌 소리에 따라 1분 동안 일제히 묵념을 올렸다. 또 이날 하루 동안 음주가무를 삼가, 애도의 뜻을 기리기도 했다.

인민군 만행을 규탄하는 이 같은 궐기대회는 이튿날부터 군·읍·면 지역으로 확산되어 추자도 주민들은 5월 25일 오전 인민군 만행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열어 반공 대열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사상 유래 없이 2천여 명의 많은 주민들이 참가한 이날 궐기대회에서 분노에 찬 주민들은 김일성 등의 허수아비를 불에 태우는 행사를 벌였으며, 어선 70여 척을 동원, 해상퍼레이드를 벌이면서 북한 무장 간첩의 만행을 규탄하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추자도 간첩 침투 사건은 제주도민들의 반공 의식을 새롭게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이 사건을 통하여 예비군 교육과 훈련 및 동원 등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취약 도서 지역에 대한 경계 경비 강화와 예비군 및 방위 소집자에 대한 사격술 향상이 새로운 과제로 대두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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