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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600
한자 海女抗爭
영어음역 Haenyeo Hangjaeng
영어의미역 Famale Divers' Uprising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찬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생존권 수호 항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931년 12월 2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32년 1월 27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제주읍 해녀 조합
관련인물/단체 제주 해녀

[정의]

1931년에 해녀 조합의 횡포에 항의하여 제주 해녀들이 벌인 시위.

[역사적 배경]

1930년대 접어들어 해녀들의 권익을 보장해 주어야 할 해녀 조합이 철저히 어용화되어 그 횡포가 극에 달하였다.

[목적]

제주도 해녀들의 생존권 수호가 목적이었다.

[발단]

1931년에 해녀 조합 측에서 하도리 해녀들이 캐낸 감태와 전복의 가격을 강제로 싸게 매기려 하자 이에 해녀들이 강력 항의하였다. 거센 항의에 부딪힌 해녀 조합 측은 정상적인 매입을 약속했으나 몇 달이 지나도록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결국 하도리 해녀들은 해녀 조합의 무성의한 태도에 반발하여 직접 투쟁에 들어가기로 결의하였다.

[경과]

1931년 12월 20일에 하도리 해녀들은 회의를 열어 해녀 조합에 대한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확정하고, 즉각 해녀 조합 사무소가 있는 제주읍으로 향했다. 경찰의 제지를 염려하여 발동기선을 타고 제주읍으로 향했으나, 폭풍으로 배가 나아가지 못해 첫 번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 본격적인 해녀 투쟁은 다음 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1932년 1월 7일에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세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들고, 어깨에는 양식 보따리를 매고 하도리에서 시위 행렬을 지어 세화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부근 마을에서 모인 해녀들까지 합세하여 해녀 조합에 대한 성토를 하고 제주읍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 행렬이 평대리 구좌면사무소에 다다르자, 구좌면장이 나서서 요구 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함에 따라 오후 5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구좌면장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해녀 조합에서는 채취물에 대한 지정 판매를 강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해녀 조합의 지정 판매에 불만을 품어오던 구좌면과 성산면의 해녀들은 각 마을별로 회의를 여는 등 해녀 조합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마침 해녀 조합에서 정한 지정 판매일인 1월 12일은 제주도사 겸 제주도 해녀 어업 조합의 조합장이었던 다구치[田口禎熹]가 새로 부임한 뒤 순시하러 구좌면을 통과하는 날인 동시에 세화리 장날이었다. 따라서 구좌면 하도리·세화리·종달리·연평리, 정의면[현 성산읍] 오조리·시흥리 등의 해녀들은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이 기회에 제주도사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기로 결의하였다.

1월 12일 장날이 되자 세화 경찰관 주재소 동쪽 네거리에 종달리·오조리 해녀 300여 명과 하도리 해녀 300여 명, 세화리 해녀 40여 명 등 640여 명이 일시에 모여들었다.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휘두르면서 만세를 외치며 세화장으로 향하였다. 해녀들은 세화장에 모여든 군중들과 더불어 집회를 열고, 각 마을 해녀 대표들이 항쟁의 의지를 다지는 연설을 차례로 하였다.

자동차에 탄 제주도사 일행은 모여 있는 시위대를 발견하였다. 시위대에 놀란 제주도사 일행은 구좌면 순시를 포기하고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자 시위대는 집회를 중단하고 차에 탄 제주도사를 에워쌌다.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라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제주도사는 해녀들과의 대화에 응하기로 하였다. 이에 해녀 측에서는 지정 판매 반대, 해녀 조합비 면제, 제주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의 항일적 성격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직접 제주도사와 담판을 벌였다. 마침내 해녀들은 5일 이내에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해결해 주겠다는 제주도사의 약속을 받아내었다.

[결과]

제주도사가 돌아간 이후 일제는 무장 경관대를 출동시켜 1932년 1월 23일부터 1일 27일까지 34명의 해녀 주동자들과 수십 명의 청년들을 연행하였다. 심지어 전라남도 경찰부에서 응원 경관까지 파견되자 이에 각 마을 해녀들은 심하게 반발하였다.

1월 26일 우도 해녀들은 주동자를 검거하러 온 배를 에워싸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월 27일에는 종달리 해녀들이 검거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됨으로써 비로소 해녀들의 저항은 진정되었다.

1931년 12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지속되었던 제주도 해녀 항쟁은 약 17,000여 명이 참여하였고 대소 집회 및 시위 횟수가 약 230여 회에 달하는 대규모 시위 운동이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때의 무수히 많은 항일 운동 가운데 제주도에서 일어난 해녀 항쟁은 여성들, 그것도 사회적으로 전통 시대부터 천역(賤役)으로 천시 받던 해녀들이 일으킨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해녀 항쟁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던 항일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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