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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제주교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334
한자 天主敎濟州敎區
영어음역 Cheonjugyo Jeju Gyogu
영어의미역 Roman Catholicism, Jeju Paris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114[관덕로8길 14]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현혜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교회
설립연도/일시 1977년 3월 21일연표보기
설립자 박정일 주교
전화 064-751-0145~7|064-753-7672
팩스 064-756-5531
홈페이지 천주교 제주교구(http://www.diocesecheju.org)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천주교 소속 단체.

[개설]

맨 처음 제주에 복음이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1592~1598) 때 일본에 갔다가 유럽 사신들을 따라 제주로 돌아온 김복수가 천주교 교리서 및 기도문을 가지고 와서 복음을 소개하면서부터이다. 또한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이 항해 도중 제주에 표착하였고, 후일 귀국하여 유럽 12개어로 번역 발표한 『표류기』속에서 그가 당시 크리스트교 신자였음을 입증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알려지게 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정난주(마리아, 아명 명련)가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되면서였다. 1845년에는 김대건(안드레아) 성인이 제주 앞바다에 표착하였으며, 1858년에는 함덕리 출신의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이 표류하여 홍콩에 도착한 뒤에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제주 지역에서도 처음으로 전교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기량은 이후 육지를 오가며 성사를 받았으며, ‘제주의 사도’가 되어 이웃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제주 신앙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김기량은 1866년 체포되어 경상도 통영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그로부터 교리를 배워 예비 신자가 된 김이라는 사람은 박해를 피해 살아났으나 1899년에 사망하였다.

제주 지역에 복음이 다시 전파된 것은 당시 제주 중문 색달리 출신인 양용항(베드로)과 이 라우렌시오가 육지를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1898년 4월경에 세례를 받고 제주로 돌아와 신 아우구스티노와 바오로 형제, 김생원 등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제8대 조선교구장 민 아우구스티노(G. Mutel, 閔德孝) 주교가 제주본당의 설립과 성직자 파견을 결심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제주본당(현 제주 중앙 본당)의 설립은 1899년 4월 22일 발표되었다. 동시에 수원 갓등이 본당(현 왕림 본당)에 재임하던 배 카를로(C. Peynet) 신부와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새 신부가 제주에 임명되어 5월 26일 제주에 도착하였다. 이를 계기로 제주에는 제주교회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초기 제주교회는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여 1901년 초에는 영세자 240여 명, 예비 신자 7백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1901년에 신축난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신자는 물론 양민까지 포함하여 7백여 명이 관덕정 광장에서 죽음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때 사망한 신자들의 시신은 화북천 주변에 묻혀져 있었다. 1903년 조정에서는 아라동 부근 황무지를 매장지로 결정하여 옮겨 묻도록 하였다. 이곳이 현재의 황사평 성지이다.

한일합방은 제주교회에도 시련을 안겨 주었다. 성당이 폐쇄되고 성직자, 수도자들이 투옥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당시 이 고장 선교를 담당했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부들의 노력으로 교회 재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4·3 사건(1948) 등 의 사회적 혼란이 교회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교회는 수많은 피난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들을 비롯한 신자들을 수용하여 대성시를 이루기도 하였고, 또한 그들의 힘을 얻어 선교 활동에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가톨릭 구제회를 통한 구호 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런 사업들에 힘입어 점차 제주본당의 자본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1971년 제주지목구로, 1977년 제주교구로 승격하게 되었다.

[설립목적]

교황 바오로 6세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1971년 6월 28일(국내 발표는 7월 14일), 제주감목 대리구를 ‘제주지목구(濟州知牧區)’로 설정하였다. 제3대 광주대교구장으로 재임하던 헨리(H. W. Henry. 玄海 하롤드) 대주교를 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1899년 제주본당이 설립된 지 72년만이었고, 1956년 제주감목 대리구가 설정된 지 15년만이었다. 광주대교구로부터의 분리는 제주 지역 교회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다.

제주지목구는 헨리 대주교가 선종한 지 1년 만에 정식 교구로 승격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1977년 3월 21일(국내 발표 4월 23일) 제주지목구를 정식 교구로 설정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4월 15일(국내발표 4월 23일)에는 광주대건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박정일(朴正一)(미카엘) 신부를 주교로 서임하는 동시에 초대 제주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제주본당이 설립된 지 78년만이었다.

[변천]

1971년 포교 관할이 광주 대교구에서 제주지목구(준교구)로 설정되었고 지목구장으로 광주대교구장이던 현 하롤드 대주교가 취임하였다. 1977년 지목구에서 정식교구로 승격되었으며, 박정일(미카엘)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 1984년에는 로마에서 주교로 성성된 김창렬(바오로) 주교가 주교좌 성당에서 착좌식을 가짐으로써 제2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제주교구는 현대화 작업과 성장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추진해 나갔으며, 그 결과 본당과 단체 및 신자수가 증가하였다.

제주교구는 감목 대리구 설정 당시에는 3개의 본당에 3,261명의 신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지목구 설정 당시에는 8개 본당, 24개 공소에 11,920명의 신자수와 성직자수 20명(한국인 6명, 외국인 14명)을 기록하였다. 1977년 교구 승격 당시에는 10개 본당, 22개 공소에 총 신자수가 13,563(남자 5,699명, 여자 7,864명, 교적 미정리자 144명)이었고, 성직자수는 주교 1명, 신부 16명(한국인 8명, 외국인 8명) 등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교구의 교세는 크게 증가하였다. 1984년 말에는 12개 본당에 총 신자수 21,143명을 기록하였고, 6년만인 1990년 말에는 15개 본당에 총 신자수가 31,127명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제주의 총 인구수 대비 신자 점유율은 6%였다. 1996년 말에는 총 신자수가 4만 명을 넘어 41,938명을 기록하였으며, 선교 100주년을 맞이한 1999년 말에는 총 신자수가 50,761명으로 증가하면서 인구 대비 신자 점유율 10%에 가까운 성장을 하게 된다.

현재 제주교구에는 24개의 본당과 11개의 공소에 성직자 39명(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3명, 수도회 2명 포함), 수도자 약 120명, 신자 약 58,000여 명이 있다.

[주요사업과 업무]

본당과 공소 등의 관리 및 여러 사회복지 사업과 선교 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활동사항]

천주교 제주교구는 4·3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이후까지 가톨릭 구제회(NCWC) 등을 통해 피난민과 도민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

1962년 한림본당 주임 신부이던 임 파트리치오 신부에 의해 농업법인 이시돌 농촌개발협회가 설립되었고, 한림 수직사를 운영하여 축산업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1970년 임 파트리치오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수녀회의 책임 하에 있는 병원을 한림읍 대림리에 유치하였다. 성 이시돌 의원을 개원하여 제주 지역에 의료 혜택을 주는 데 앞장섰다.

사회복지 사업도 계속 전개하여 1986년 성 요셉 양로원을 설립하여 노인복지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92년에는 작은 예수회가 도입되어 지체·정신박약자들에게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1994년에 도입된 살레시오 수도회의 '젊음의 집'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참된 가치관을 확립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활용하면서 새로운 교육의 도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1980년대의 정치 현실 속에서 인권이 존중되는 정의 사회 실현을 위해 앞장서 왔다. 1987년 12명의 방인 사제단은 전국 사제단의 뜻에 동참하여 인권 회복을 위한 6일 단식 기도를 드리면서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90년대에 황사평과 정난주 묘소의 성역화, 삼뫼소 은총의 동산 신앙 행사의 정례화 등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 실현된 라파엘호의 복원과 김대건 신표착지 확인 및 기념사업은 제주교구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에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제주교구는 1999년 11월 21일 선교 100주년 기념 신앙 대회를 열었다. 2002년 10월 8일, 제3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강우일(베드로) 주교는 공동체의 성숙을 강조하면서 교구를 이끌어가고 있다. 소공동체 운동은 물론 전 신자가 성서쓰기를 생활화하고 있다. 2003년 8월 30일 제1차 소공동체 대회에 이어 2004년 9월 5일 제2차 소공동체 대회를 열어 참여, 봉사, 나눔의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6년 12월 11일 천주교 제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평화의 섬 제주도와 해군기지는 양립할 수 없다는 해군기지 반대선언을 발표하였다. 또한 천주교 제주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는 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황]

평신도 단체로는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비롯하여 교구장이 승인한 26개의 단체가 상호 협조를 통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제주 교구청 조직은 교구장 강우일(베드로) 주교를 비롯하여 총대리, 사무처, 사목국, 교육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천주교 제주교구는 제주 지역의 선교뿐만 아니라 제주 지역의 각종 사회 문제 및 사회복지 사업에 꾸준한 참여를 하고 있다. 또한 제주 지역 인구의 10%가 천주교 신자라는 점은 다른 지역에 비해 천주교 제주교구의 높은 입지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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