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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250
한자 趙仁後
영어음역 Jo Inhu
이칭/별칭 유보(裕甫),일락(一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일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제주판관
성별
생년 1541년(중종 36)연표보기
몰년 1599년(선조 32)연표보기
본관 평양
대표관직 영암군수|제주판관|대사간

[정의]

조선 중기 제주판관을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평양. 자는 유보(裕甫), 호는 일락(一樂). 아버지는 조경운(趙慶雲)이며 어머니는 김응무(金應武)의 딸이다. 형은 공조참판 조인득(趙仁得)이다.

[활동사항]

1567년(명종 2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5년(선조 8) 1월에 전라도 영암군수로 부임하였다가 1575년 8월에 체직되었다. 1577년(선조 10) 5월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였으나 1년도 채 못 되어 질병으로 사직원을 제출하고 떠났다.

제주판관 재임 중 민폐를 근절하고 학교를 일으켰으며, 농업을 권장하여 백성의 생활을 개선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형벌이 가혹한지 여부를 살피고 부역을 가볍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578년(선조 11) 충암(沖菴) 김정(金淨)의 공을 기려 김정이 생활하던 유배지에 충암묘를 세웠다. 조인후가 이때 충암묘를 세운 것은 후일 오현단(五賢壇)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1666년(현종 7) 제주판관 최남진(崔南鎭)은 충암묘를 장수당(藏修堂) 남쪽으로 이건하면서 충암사(冲庵祠)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이 1682년(숙종 8)에 ‘귤림(橘林)’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굴림서원에는 제주에 유배된 사람 혹은 관인으로 제주에 와서 제주 문화의 발전과 민폐 제거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는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송인수(宋麟壽)·송시열(宋時烈) 등이 김정과 함께 배향되었다. 귤림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나, 1892년(고종 29) 그 자리에 오현단(五賢壇)이 설치되었다.

조인후가 제주판관 재임 중 펼친 시정에 대해서 『남사록(南槎錄)』에는 “폐단을 혁파하고 학문을 일으켰으며 청렴하고 까다롭지 않았다. 남의 힘을 빌지 않고 스스로 생활해 나아갔다”라고 평가되어 있다.

또한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조인후가 제주를 떠날 때의 모습을 “구름과 안개에 갇혀 있다가 푸른 하늘을 보는 것과 같았다. …병으로 사임하여 (제주) 떠날 때 길가에 백성들이 늘어서서 부모와 이별하듯이 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제주성 동문 안길 왼쪽에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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