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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동 한천 유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475
한자 龍潭洞漢川遺跡
영어음역 Yongdam-dong Hancheon Yujeok
영어의미역 Hancheon Archaeological Site in Yongdam-dong
이칭/별칭 제주시 용담동 한천 주변 유적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물 산포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오라동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
집필자 강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주거지|석곽묘|지석묘|고대 마을터|제사 유적
지정면적 990,000㎡ 정도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오라동 일대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오라동 일대에 있는 선사시대에서 고대에 해당하는 생활 유적.

[개설]

제주시를 아우르고 있는 하천인 한천·병문천·산지천 중에서 탐라 시대에 중심이 된 하천은 한천이다. 한천 주변에는 10만여 평에 가까운 고대 마을터·옹관묘·석곽묘·9기의 고인돌·제사 유적 등이 남아 있다. 이 유적들과 유물의 분석을 통해 한천 주변에는 탐라 시대에 거점 취락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제주섬 안의 여러 읍락을 지배하는 국읍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형태]

한천변 일대에서 구석기 시대 인류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다만, 제주시 제2도시 우회 도로 구간을 발굴하면서 한천변 도남동 구산 마을 일대에서 빙하 최성기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토양 쇄기층(soil wedge layer)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중인 유물 중에는 한천변 오라동 동성 마을 일대의 지표상에서 수습한 소형 손도끼(hand-axe)가 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2001년 제주국제공항 확장 공사를 진행하면서 도두동용담동을 중심으로 확인되었다. 이 유적들에서는 신석기 시대 초기의 고산리식 원시 무문 토기와 타제 석기, 신석기 시대 조기의 융기문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한천 주변 평탄 대지를 중심으로 10,000년 전부터 수렵 집단이 거주한 사실이 입증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적은 제주시 용담동·삼양동 유적으로 대표된다. 이 유적들을 통해 상모리 공렬 토기 제3단계에 와서 제주도 전역으로 주민이 확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한반도에서 초기 철기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점토띠 토기는 제3단계의 공렬 토기와 섞여 출토된다. 이는 용담동·삼양동 유적의 기원전 2세기에서 출발하여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연결되는 대단위 취락지에서 확인된다.

삼양동 마을보다 더 큰 마을의 존재는 2세기경에 한천 서쪽 평탄 대지에 자리한 용담동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용담동 마을의 위상은 유물 산포지의 범위가 수만 평에 이르는 마을 공간의 규모·고인돌군의 무게·축조 기술의 우수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일대가 읍락의 읍이 자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탐라국으로의 이행은 우선 국읍 지배층의 존재를 찾아야 한다. 이런 증거는 1985년에 발굴된 용담동 적석묘역 목관묘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묘제는 위석형 병풍식 고인돌(용담동 6호)과 동일한 시기에 축조되었다.

한천변 용담동 일대의 거점 마을의 등장, 국읍의 형성과 관련된 자료는 용담동 무덤의 부장품에서 확인된다. 부장품은 철제 장검·단검·창·도끼·화살촉·유리 구슬 등이 세트화된 중국 한나라 제품으로 나타난다. 이 용담동 철기 부장 묘역의 연대 추정에는 부산 노포동 유적과 김해 양동리 유적 출토품의 연대가 비교가 된다. 즉, 이 유적들에서 출토된 소용돌이 문양 장식 철검과 삼각형 만입 편평 철촉의 연대를 2세기 중반 이후로 보고 있다.

용담동에 있는 판석형·위석형 고인돌은 한반도에서 가장 늦은 원삼국시대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제주도식 고인돌을 대표한다. 1959년도 조사 당시에 원래 20여 기가 있었으나, 현재 확인된 것은 한천 중류 부근에 3기, 하류 부근에 2기, 먹돌새기 지점에 1기, 공항 입구에 옮겨진 2기 총 8기이다. 이중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것은 1호 고인돌 1기뿐이다.

[의의와 평가]

탐라에서 분명하게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지배층의 출현은 5세기 말부터인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최고위의 국왕 또는 국주 그 아래에 왕자와 좌평이 확인되는 것은 7세기 말이다.

이를 입증하는 유적으로는 탐라 국왕의 교역에 따른 제의 장소인 한천변 용담동 제사 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위를 행한 후 폐기한 도자기, 금동제 허리띠 장식 등의 고급 물품이 확인된다. 그 의례 행위는 아마도 제사 행위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된 문헌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이원진『탐라지(耽羅誌)』에는 ‘이것은 탐라 국왕이 친히 경작하던 풍속이 남은 것이다(是耽羅王積(藉)田遺俗)’이라 하여 탐라국주가 주관하는 농경과 관련된 의례 행위가 있었음을 전한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일본서기(日本書紀)』·『당회요(唐會要)』 등에는 탐라국의 활발한 조공 외교 기록이 보인다.

용담동의 제사 유적은 기록에 보이는 국가의 중대사로 배를 떠나보낼 때마다 원거리 항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행위가 이곳에서 거행되었음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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