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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474
한자 龍潭洞鐵器類
영어음역 Yongdam-dong cheolgiryu
영어의미역 ironware excavated from Yongdam-d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지도보기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집필자 강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분 부장품|철기
제작시기/일시 2~3세기
제작지역 중국
재질 철기
소장처 국립제주박물관
소장처 주소 국립제주박물관
소유자 국립제주박물관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에서 출토된 고대의 철기류.

[개설]

이 유물은 용담동 고분 북쪽의 석곽묘와 그 주변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류이다. 그 종류는 장검 2점·단검 1점·철모와 그 세트로 추정되는 유물 각 1점·끌형 철기 1점·궐수형(蕨手形) 철기 2점·부채형 쇠도끼 2점·소형 쇠도끼 3점·수십 점의 삼각형 양익만입 철촉·판상 쇠도끼 등이 있다.

[형태]

용담동 고분 출토 장검은 길이가 85㎝ 이상 된다. 이러한 장검은 중국 전한 중·후기에 성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평안남도 황해도 지방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김해 양동리 고분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단검은 서북한 지방뿐만 아니라 경상도와 일본 큐슈[九州] 지방에서도 여러 점이 발견되었다. 전단계의 세형동검을 모방한 세형·단봉의 단경식과 이보다 뒤 시기의 것으로 전체 길이 40㎝로 다소 길어진 장경식이 있다. 용담동 단검은 후자에 속한다.

철모는 한반도 출토 단봉 형식의 세형동과를 모방한 것으로 남북한 지방과 일본 큐슈 지방에 골고루 퍼져 있다. 끌형 철제 무기는 유공식과 무공식 2점이 출토되었다. 유공식은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방 토광 목관묘와 목곽묘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 바 있다.

주조 쇠도끼는 경상도 지방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중국 화북 지방, 소련 연해주 지방에서는 한대(漢代) 또는 삼국 위대(魏代)의 예가 있고, 일본에서는 야요이[彌生] 후기 말의 예가 있다.

철촉은 무경양익형으로 길이가 5㎝ 미만의 단촉에서 10㎝ 정도로 장대화한 것 등 다양하다. 이러한 기부 만입촉의 형태는 모두 삼각형으로, 형식 발전상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출토된 예를 통틀어 그 중간 단계의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특징]

용담동 북쪽 묘역 철기 유물의 연대에 대해서 지금까지 한일 학자의 편년 기준으로 제시되는 주요 철제품인 삼각형 철촉과 주조 쇠도끼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는 최고대의 철촉이 출토된 후쿠오카현[福岡縣] 吉ア浦 유적의 연대는 야요이 시대 중기 중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용담동 것과 크기와 형식이 비슷한 철촉의 길이는 6~9㎝이고 기부는 곡선화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천봉(天鳳) 원년에 주조된 화천(貨泉)이 발견된 바 있다.

결국 용담동 철기류와 비슷한 수준의 일본과 남한 지방 유적·유물의 연대는 1~3세기의 원삼국 시대에 속하고, 기록상으로는 중국 후한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용담동 일괄 유물이 후한대에 속한다는 것은 이 유적 출토 유리의 성분 분석 자료가 중국 후한대의 것과 일치하는 사실에서도 뒷받침된다.

[의의와 평가]

탐라가 소국이든 수장 사회이든지간에 그 근간이 되는 용담동 철기 부장 묘역의 소속 시기는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부산 노포동 유적과 최근 김해 양동리 유적 보고서에 따르면, 용담동 무덤 유적 출토 소용도리 문양 장식 철검과 삼각형 만입편평 철촉의 연대를 2세기 중반 이후로 잡고 있다. 이청규의 연대 설정은 일본 학자의 철촉 편년에 따른 것으로 그 상한을 1세기 말에 두었다. 한반도 육지부 지역의 편년은 해당 고분의 상대적 서열에 준한 것이다.

이청규의 제주 상고사 편년 중에서 결정적으로 취약했던 부분은 입계화 초기 사회 직전 단계의 사회적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를 설명해 주는 삼양동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주 상고사 편년의 일부분을 수정·보완해야 하는 단계에 왔다. 삼양동 초기 단계는 공반 유물과 주거지 상관 관계 분석, 한반도 육지부 지역 유물과의 교차 연대를 고려할 때, 늦어도 기원전 2세기 중반경이다. 이 단계에 이미 고인돌이 축조되면서 불평등 사회로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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