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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 마을 방화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364
한자 淵味-放火事件
영어음역 Yeonmi Maeul Banghwa Sageon
영어의미역 Yeonmi Village Arson Incident
이칭/별칭 오라리 방화 사건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윤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방화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48년 5월 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제주읍 오라리 연미 마을
관련인물/단체 김익렬|김달삼/서북청년단|대동청년단

[정의]

1948년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 연미 마을에서 우익 청년단원에 의해 발생한 방화 사건.

[개설]

1948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4·3 사건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무장대와 국방 경비대가 즉각적인 전투 중지를 합의하지만 5월 1일 우익 청년단원들이 제주읍 오라리 연미 마을에 불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두 진영 사이의 합의가 깨지고 만다.

[역사적 배경]

1948년 4월 3일 제주 지역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나면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4월 28일 국방 경비대 제9연대 김익렬 연대장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회담을 갖고 ‘즉각 전투 중지’ 등 당면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에 합의를 보았다.

그런 와중에 우익 청년단원들이 연미 마을의 일부 가옥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국방 경비대 제9연대는 현장에 급히 도착하여 조사를 벌인 결과 ‘우익 청년단원들의 소행’임을 알아내고 미군정 당국에 보고했다. 하지만 미군정 당국은 경찰의 보고를 토대로 ‘폭도들의 소행’이라며 강경 진압 작전을 명령했다.

[경과]

1948년 4월 30일 제주읍 오라리 대동 청년단원의 부인 두 명이 마을 주민들에 의해 납치됐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이 출동했고, 납치된 부인 중 한 명인 강공부가 유격대의 총에 의해 희생되고 나머지 한 명은 가까스로 탈출했다.

5월 1일 연미 마을에서 강공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경찰 트럭에 실려 고향 마을에 온 강공부의 시신은 ‘제기물 동산’에 안장했다. 이때 경찰 트럭을 타고 대동 청년단, 서북 청년단 등 우익 청년단원 30여 명도 함께 왔다. 장례가 끝난 후 경찰관은 트럭을 몰고 돌아갔지만 현지에 남은 우익 청년단원들에 의해 방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 청년들은 5월 1일 12시경 연미 마을에 들어와 허두경, 강병일, 박태형, 강윤희, 박전형 등의 집 5세대 12채의 민가에 차례로 불을 질렀다. 불타버린 집의 주인들은 좌익 활동을 활발히 하던 주민이었다. 이에 민오름 주변에 있던 유격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들을 추적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두 대의 트럭을 타고 오후 2시경 출동하였지만 이미 마을 안의 유격대는 사라진 뒤였다. 경찰들은 국방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등이 현지 조사차 연미 마을에 들어서자 서둘러 철수했다.

[결과]

4월 28일의 협상을 통해 4·3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고 판단했던 국방 경비대 제9연대는 ‘오라리가 우익 청년단원들의 습격에 의해 민가가 불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국방 경비대 제9연대 김익렬 연대장 등은 직접 현장을 파악하기 위해 5월 1일 오후 4시 30분경 연미 마을에 도착했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을 방문하여 방화 경위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방화 사건이 폭도가 아닌 우익 청년단원들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익렬은 조사 결과를 제주도 군정 장관 맨스필드 대령에게 보고했으나 맨스필드는 서울에서 내려온 미군 정보기관 간부를 만날 것을 제의했다. 곧바로 G-2 장교와 CIC 간부를 만난 김익렬제주읍 오라리 연미 마을 방화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하지만 미군 장교들은 “경찰 보고와 다르다. 그것은 폭도들이 한 짓이다”라며 김익렬 연대장의 주장을 일축했다.

국방 경비대 제9연대 수뇌부는 연미 마을 방화 사건의 방증 자료 조사를 벌이고 주민들이 방화 주동자로 지목한 대동 청년단원 박 모 씨를 검거하여 모슬포 국방 경비대 제9연대 본부 영내에 구금 조치했다. 그러나 제9연대의 이러한 노력도 불구하고 5월 5일 김익렬 연대장은 미군정청 딘 장군에 의해 전격 해임된다.

대동 청년단원 박 모 씨는 후임 박진경 연대장에 의해 구금 22일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주민들이 반발하자 제주 경찰서 유치장에 38일간 구금시킨 후 풀어주었다.

[의의와 평가]

연미 마을 방화 사건의 현장은 미군이 공중과 지상에서 입체 촬영한 소위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기록 영화에도 생생히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우발적 사건이라면 이렇듯 ‘입체 촬영을 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또 기록 영화에 등장하는 ‘당혹한 표정으로 경찰에게 자기 마을이 어떻게 게릴라에게 공격을 받았는지 설명하는 여인’이나 ‘공산 반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남자’ 등은 이후 확인 결과 모두 제주읍 오라리 연미 마을 주민이 아니었다.

단순한 사건 같으면서도 미묘하고 복잡한 사건이 뒤얽혀 일어난 제주읍 오라리 연미 마을 방화 사건은 제주도 4·3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미군정 당국이 강경 진압 작전을 전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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