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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 청년회 제주도 지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092
한자 西北靑年會濟州道支部
영어음역 Seobuk Cheongnyeonhoe Jejudo Bonbu
영어의미역 Northwest Youth, Jejudo Headquarter
이칭/별칭 서청(西靑) 제주도 지부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윤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우익 청년 단체
설립연도/일시 1947년 11월 2일연표보기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었던 서북 청년회 소속 제주 지부.

[설립 목적]

조국의 완전 자주 독립 전취, 균등 사회의 건설, 세계 평화의 건설이란 강령을 세웠지만, 조선의 국제 문제를 방해하는 음모자들을 제거한다는 행동 지침을 세워 좌익에 대한 척결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변천]

서북 청년회는 대한 혁신 청년회(1945년 10월 30일 결성)·함북 청년회·북선 청년회(北鮮靑年會)·황해도회 청년부·양호단(養虎團)·평안 청년회[1946년 4월 결성] 등의 단체가 1946년 11월 30일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모여 결성하였다.

서북 청년회 제주도 지부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47년 11월 2일이다. 이날 제주읍 제주 극장에서 결성 대회를 갖고 위원장에 장동춘(張東春), 부위원장에 박병준(朴炳俊)을 선출하였다.

서북 청년회가 제주 지역에 등장하게 된 시발은 1947년 3·1절 기념 시위 사건 발생 직후 제2대 제주도지사로 발령받은 유해진이 경호원 자격으로 서북 청년회원 7명을 데리고 온 것이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에 대거 들어오기 시작했다. 1948년 제주 4·3 사건 발발 직후 당시 경무부장의 요청에 따라 제주 4·3 진압 요원으로 서북 청년회원 500명이, 여수·순천 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에서 12월까지 두 달 사이에 최소 1,000명 이상의 회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의 신분으로 들어와 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에 뛰어들었다.

[활동 사항]

서북 청년회가 처음 제주 지역에 들어올 때는 어떠한 직책이나 공식 업무를 띠고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지인에게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가운데는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들고 다니며 거의 강압적으로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산포 등지에서 이들의 물품 구매에 냉담하였던 주민들이 제주 4·3사건의 와중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서북 청년회의 위세가 드세어지고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경찰 보조 기능이 부여되던 194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공산당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백색 테러가 노골화되었다.

서북 청년회원들은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가족들은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돈을 바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폐와 불법적인 테러 행위는 미군정의 정보 보고서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고 강경 진압이 지속되던 1948년 11월 9일 제주도청 총무국장 김두현이 서북 청년회 제주도 지부 사무실에서 고문을 받고 살해되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

또한 제주 지역의 유일한 일간지였던 『제주신보』를 강압적으로 접수하여 운영하는 등 그 횡포가 극에 달하였다. 서북 청년회는 경찰은 물론 군인으로도 변신하였다. 송요찬(宋堯讚)[1918~1980] 9연대장은 서북 청년회원들을 군에 편입시켜 이른바 특별 중대를 만들었다. 계급장도 없는 군인 아닌 군인이었지만 9연대 헌병대나 장교들도 간섭하지 못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제주 4·3 사건은 서북 청년회와 그 관계를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다. 서북 청년회는 제주 4·3 진압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제주 4·3 발발 이전에 이미 테러 행위 등으로 제주도민의 감정을 자극하여 제주 4·3 발발의 한 요인으로 지적될 정도로 제주도와 악연을 갖고 있었다.

서북 청년회 중앙 본부의 문봉제(文鳳濟) 단장은 증언을 통해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달라고 하면 서북 청년회를 파견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다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이다.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느냐?”고 해명성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렇듯 서북 청년회가 제주도민에게 남긴 상처는 악몽 같은 것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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