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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재 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983
한자 司馬齋-
영어음역 Samajaeteo
영어의미역 Samajae House Site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06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동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적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1879년연표보기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06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생원, 진사 등 사마시에 합격한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하던 사마재의 터.

[개설]

학문 연마를 목적으로 세워진 사마재에 1876년(고종 16) 8월에 유배 온 이세직이 세를 내어 살면서 학생들을 모아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학문 연마, 강독 강론과 대과 준비를 위하여 1876년(고종 16)에 제주목사 백낙연사마재를 창건하였다.

당시 제주도에 유배 왔던 운양 김윤식이 남긴『속음청사(續陰晴史)』를 보면 “처음에 이세직이 사마재에 세를 내어 살면서, 학생들을 모아 일본어를 가르치니 읍내 소년배가 많이 이세직을 쫓아다녔는데 적객 이태황과 최형순도 가서 배우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태황이 세들어 살고 있던 집주인 훈장 이규항이 이 사실을 알고 이세직과 제자들을 찾아가 “너희들이 왜놈을 닮을까 두렵다”고 하자 사제 모두가 화가 나서 이규항을 발로 차고 사마재 마당에 세운 뒤 이규항을 책망하였다.

이규항 훈장은 당시 60살의 노인으로 유생에서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소년배들에게 욕을 당하자 통문으로 유생 39명을 모이게 하여 “잡것들의 소굴을 돌려 달라”고 관에 호소했다.

이에 제주목사는 “적거인은 마땅히 두문하여야 함에도 무리를 모아 일어를 가르치면서 사단을 일으키고 있다”며 “사마재는 유림에게 돌려주고, 학도들은 해산하라. 때리고 욕을 한 사람은 잡아 가두고 엄히 징계하라”고 명했다.

이 사건은 당시 구한말 제주에도 일본어 강습이 이루어졌으며, 많은 소년들은 물론 유배객들까지 새로운 문물에 접하려는 의식이 강했으나,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배일 감정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황]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심부의 중앙로 부근에 그 터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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