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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태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858
한자 伯伯太子
영어음역 Baekbaek Taeja
영어의미역 Prince Baekbaek
이칭/별칭 박박태자(拍拍太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일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배인
출신지 중국 윈난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404년(태종 4)연표보기

[정의]

고려 후기 제주도로 망명한 원나라 왕족.

[개설]

14세기 후반 원명교체기에 탐라에는 원나라의 왕족 세력이 자발적으로 망명해 왔다. 또한 명나라가 잔존 세력으로 버티던 원나라의 왕족을 평정하여 탐라에 유배를 보냈다. 귀순한 원나라 왕실의 수많은 자손들도 탐라로 보냈다.

1388년(창왕 1) 명나라는 귀순한 원나라 왕족 달달친왕(達達親王) 등 80여 호를 탐라에 보낸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들이 거처할 곳을 보고하라고 하였다. 고려는 전리판서 이희춘(李希椿)을 탐라에 보내 85곳에 달하는 거처를 새로 짓거나 수리하도록 하였다. 이들 거처는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동에 자리 잡은 원당봉(元堂峰)의 북쪽으로 추정된다.

거처가 마련된 지 약 5개월 후에 명나라는 귀순한 원나라의 왕족을 탐라에 유배 보냈다. 이로써 탐라에는 조선 전기까지 원나라 왕족과 관련된 양(梁)·안(安)·강(姜)·대(對) 등의 성을 가진 주민이 상당수 있게 되었다.

[활동사항]

원나라의 윈난(雲南) 양왕(梁王)의 아들로 박박태자(拍拍太子)라고도 한다. 1381년(우왕 7) 양왕이 명나라에 쫓겨 보령으로 달아나 자살하였고, 백백태자는 아들 육십노(六十奴)와 내시 복니(卜尼) 등을 데리고 1382년(우왕 8) 7월 탐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양왕의 자손 애안첩목아(愛顔帖木兒) 등 4인이 탐라로 유배되자 그들과 함께 살았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인 1393년(태조 2), 백백태자는 말 3필과 금환(金環)을 조선 정부에 바쳤다. 이에 조선 정부도 화답하는 뜻으로 1395년(태조 4) 백백태자에게 쌀 400곡과 저마포 30필, 양왕(梁王)의 손자에게는 쌀과 콩 100곡과 저마포 10필을 하사하였다.

1404년(태종 4)에 백백태자는 죽었고, 그가 죽은 지 40년이 지나서도 조선 정부는 그 유족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 1444년(세종 26) 3월 백백태자의 처가 연로한데다 빈궁하게 생활하므로 관청으로 하여금 매년 의복과 양식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위 임울(林鬱)에게는 군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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