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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818
한자 朴宗實
영어음역 Park Jongsi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진관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업가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성별
생년 1885년(고종 22)연표보기
몰년 1966년연표보기
본관 밀양
대표경력 제주상선주식회사 감사|제주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제주적십자사 초대 지사장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대표적 기업가.

[개설]

본관은 밀양. 호는 청암(晴巖). 아버지는 박원길(朴元吉)이며 어머니는 탐라최씨이다. 부인은 진주강씨이다. 아들은 초대 제주도지사를 지낸 박경훈(朴景勳)과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박충훈(朴忠勳)이다.

[활동사항]

5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큰댁이 있는 전라북도 부안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큰댁의 형제들과 어울려 한학을 공부하며 유년 시절을 보내다 12살 때 다시 귀향하였다.

제주에 내려온 뒤 목포 등지로 장사에 나선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장사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성냥·양초·실·바늘·창호지 등을 공급하는 소규모 소매업에서 출발하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행상을 하여 돈을 모았다.

이 돈을 밑천 삼아 1903년(고종 40) 18살에 매입한 보도반점(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칠성로 소재) 자리에 일상 소모품 등을 판매하는 상설 소매 상점을 개업하였다.

1907년(순종 1) 22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 달 후 뜻밖에도 제주읍 서문골 갑부 조덕삼(趙德三)으로부터 어머니가 생전에 맡겨두었던 60원을 받아 이를 밑천으로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하였다.

당시 제주에는 식량뿐만 아니라 면직물·의류품·기계류 등에 이르는 모든 생필품을 외지로부터 들여와야 하는 상황이었고, 대부분의 상권은 일본 상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나마 제주도에서 생산되어 육지로 반출되었던 해산물·소가죽·한약제 등 역시 일본 중개인의 손을 거치고 있어 교역의 이익 또한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 상권의 탈환과 지역 자본의 형성을 위해 일본인이 독점하던 제주 상권에 도전장을 내게 되었고, 물가 시세 변동에 대비하여 재산을 현금·부동산·상품으로 분산 투자하며 근면·절약·신용을 생활화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1922년 오랜 숙원 사업이던 해운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제주 지역뿐 아니라 한국 해운업의 기초가 되었다. 해운업 확장을 위해 1922년 제주축항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8월에 평소 친교를 맺어온 김근시·최윤순(崔允淳)·김임길(金壬吉) 등과 합작으로 제주상선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감사를 맡았다. 제주상선주식회사는 제주의 민간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해운회사였다.

제주상선주식회사는 부산, 목포 등의 연안 항로의 개설은 물론 오사카, 시모네세키의 일본 항로까지 개설하여 제주도민의 해외 진출에 크게 이바지하는 등 한국 해운업의 발전에 초석을 만들었다.

1925년 제주전매서 개설에 참여하여 초창기 전매서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제주도에 자동차가 처음 등장하자 강성익, 최윤순 등과 함께 1925년 제주통운회사를 설립하여 이사에 취임하여 제주도 육상 교통의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1931년에는 제주도 유통의 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밀가루·설탕·소주 등을 주요 품목으로 취급하는 제주상사조합을 설립하고 초대 조합장에 취임하였으며, 1935년 제주상사조합을 제주상사주식회사로 개편하였다. 1935년 제주상사주식회사를 해산한 후 삼일해운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대표이사에 취임하였다.

그 후 제주 상공인의 친목과 단결로서 상공업의 폐해를 교정하고 상권의 옹호와 발전을 위하여 제주상공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제주도 내 중소 상공인들의 인식 부족으로 권익 옹호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한다.

1939년 삼일해운주식회사를 제주상운주식회사로 개편하여 사장에 취임하였고, 1940년 4월에는 제주도 생활필수품상업조합을 설립하여 조합장에 취임하였다. 그 후 1945년 4월 일제에 의해 소개령이 내려지자 제주에서의 기업 활동을 정리하고 전라남도 나주로 이주하였다가 광복 직후 제주로 귀환하였다.

제주 귀환 후 기존 사업체를 정리하여 새로운 기업 경영을 시도하였다. 1946년 스탠다드 석유회사와 특약점 계약을 맺은 다음 제주도석유배급조합을 설립하여 조합장이 되었다.

1952년에는 제주미유주식회사를 남창석유주식회사로 개편하여 아들 박태훈(朴泰勳)이 운영하게 하였다. 박종실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해운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는데 1958년에는 철강선인 화양호(和洋號)를 여객선으로 개조하여 남창운수사를 설립하였다.

1961년 7월에 제주부두의 하역권을 획득하였으며 이리호(裡理號), 평택호(平澤號) 등의 대리권 등을 얻어 꾸준한 발전을 거듭한 끝에 1966년 4월 남창운수주식회사로 개편하여 제주상운주식회사의 명맥을 이었다.

한편, 기업 경영에 매진하는 가운데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부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제주의 발전을 위한 사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대표적으로 1949년 10월에는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제주적십자사 지사장에 취임하여 약 2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1957년 6월에는 제주도서관을 건립하여 교육 관련 기관과 학습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교육 환경에서 제주 교육의 기틀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65년 11월에는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시간을 보내며 즐길 수 있는 안식처인 경로당 청암정을 건립하여 제주 지역의 사회 복지 및 노인 복지를 향상시켰다.

[상훈과 추모]

1966년 6월 관덕정 광장에서 제주도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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