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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안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812
한자 朴安臣
영어음역 Park Ansin
이칭/별칭 백충(伯忠),박안신(朴安信),정숙(貞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제주목사
성별
생년 1369년(공민왕 18)연표보기
몰년 1447년(세종 29)연표보기
본관 상주
대표관직 제주목사|이조판서|충청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정의]

조선 전기 제주목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상주. 자는 백충(伯忠), 시호는 정숙(貞肅). 초명은 박안신(朴安信)이다. 아버지는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를 역임한 박문로(朴文老)이다.

[활동사항]

1393년(태조 2)에 생원이 되었으며, 1399년(정종 1)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등용되었다. 1408년(태종 8)에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대사헌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목인해(睦仁海) 모반 사건을 왕에게 알리지 않고 처리하다가 극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직분을 완수하지 못하여 죽음을 감수하나 임금께서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말을 들을까 두렵도다”라고 쓴 시가 태종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황희(黃喜)·하륜(河崙)·권근(權斤)·성석린(成石璘) 등의 무마로 유배에 그쳤다.

1424년(세종 6)에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귀국 도중 침입해 온 해적을 물리치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귀국 후 우사간·공조참의·예조참의·병조참의와 병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공조참판·이조참판을 거쳐 대사헌·황해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1434년(세종 16) 6월 제주목사로 임명된 박안신이 사직을 청하였는데 부인이 병으로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내가 어찌 경이 유자(儒者)임을 알지 못하여 임명하였겠나! 처의 병이 낫거든 그 직에 나가라”고 하였다.

당시 박안신이 처의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제주가 절해고도이어서 제주목사 부임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1434년(세종 16) 8월 박안신이 하직 인사를 하자, 세종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제주에 보내라고 하였으니 박안신의 처가 병이 위급한 건 사실이었다. 후임으로 최해산(崔海山)이 임명되었다.

1439년(세종 21) 형조판서, 1440(세종 22) 우참찬을 지냈으며, 1442년(세종 24) 공조판서 재임 중 나이가 많아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이조판서에 전보되었고, 1444년(세조 26)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성격이 굳세고 결단력이 있고 담론(談論)을 잘 하며, 생활은 검소하고 인색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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