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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 청년단 제주도 지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542
한자 大同靑年團濟州道支部
영어음역 Daedong Cheongnyeondang Jejudo Jibu
영어의미역 Korean Young Men's Corps, Jejudo Branch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윤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우익 청년 단체
설립연도/일시 1947년연표보기
해체연도/일시 1948년연표보기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었던 대동 청년단 소속 제주 지부.

[설립 목적]

8·15 광복 이후 혼란한 사회에 봉사하고 청년 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동단결을 이루기 위해 결성되었다.

[변천]

해방 후 제주도의 우익 청년 단체가 등장한 시점은 정국이 신탁 통치 찬성과 신탁 통치 반대 논란에 휩싸여 전국적으로 우익 조직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1946년 3월 대한 독립 촉성 청년 연맹 제주도 지부[위원장 김충희]가 발족되었으며, 곧이어 광복 청년회 제주도 지회[위원장 김인선]가 창립되었다. 두 단체는 중앙의 대동 청년단으로의 통합 방침에 따라 1947년 9월 2일부터 여러 차례 통합 논의를 하였으나 결국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9월 30일 광복 청년회 중심의 대동 청년단 제주도단부 결성식이 제주읍 조일 구락부에서 열렸다.

또한 대한 독립 촉성 청년 연맹 중심의 대동 청년단 제주도단부 결성식이 10월 3일 같은 장소에서 개최되는 등 초기에는 반목이 심하였다. 그러나 12월 21일 제주 북 공립 국민학교에서 임시 대회를 개최하고 김충희 단장을 김인선 단장으로 교체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두 단체의 갈등을 봉합하고 합치는 일에 미군 방첩 부대 CIC가 개입하였다는 보고도 있다. 1948년 이승만 정권 수립 후 해체되었다.

[활동 사항]

대동 청년단 제주도 지부 단원들은 제주 4·3 사건 초기부터 무장대의 습격 대상이 되었다. 제주도 12개 경찰지서와 우익 인사를 습격하였던 4월 3일 당일에도 여러 명의 희생자가 곳곳에서 속출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읍 영평리, 이호리, 도두리, 삼양리 등지에만 조직이 있을 정도로 세력이 약하였던 대동 청년단 제주도 지부 단원들은 비교적 안전한 제주읍으로 급히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4월 3일 이후에도 일부 마을에서는 대동 청년단 제주도 지부 단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무장대에 의해 희생당하였다.

대동 청년단 제주도 지부는 제주 4·3 사건 초기부터 경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제주 4·3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였던 김익렬(金益烈) 9연대장과 김달삼(金達三) 무장대 사령관의 4·28 회담을 뒤엎는 계기가 되었던 1948년 5월 1일 연미 마을 방화 사건[일명오라리 방화 사건] 또한 대동 청년단 제주도 지부 단원들이 저지른 것이었다.

1948년 10월 제주도에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도 경비 사령부[사령관 김상겸 5여단장, 송요찬 9연대장]가 창설되면서 대동 청년단 제주도 지부가 군경 합동 작전에 적극적으로 동원되었다.

대동 청년단 제주도 지부 단원들은 경찰 지서에서 철야 근무를 하고 경찰과 같이 출동하는 등 경찰 보조 단체의 역할을 하는 등 진압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일부 단원들은 공식적으로 경찰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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