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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부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499
한자 盧氏夫人
영어음역 Nossi Buin
영어의미역 Lady No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나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배인
출신지 서울
성별
생년 미상
몰년 미상

[정의]

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된 인물.

[활동사항]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역모죄로 사사(賜死)되었으며, 3년 후인 1616년(광해군 8) 부관참시되었다. 김제남의 아들 김래·김규·김선도 목숨을 잃었다. 김제남의 가족 중 손자 김천석(金天錫)노씨부인만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1616년(광해군 8)에 유생 이공헌·박몽준 등이 노씨부인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는 등 노씨부인을 처벌하자는 공론이 일자, 광해군노씨부인을 제주도로 유배하였다.

제주도에 유배된 노씨부인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탁주를 만들어 팔았는데, 제주도민은 노씨부인의 탁주를 모주(母主)라고 불렀다. 현재 모주라 하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제주목사 양호(梁護)노씨부인을 심하게 모욕하고 모진 박해를 가했다. 노씨부인이 기숙(寄宿)하던 집 주인 전량(全良)이 노씨부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부인을 노씨부인에게 보내 노역을 돕도록 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되었다. 1623년 3월 인조는 승지 정립(鄭岦), 예조참의 목대흠(睦大欽), 내시 김충립(金忠立) 등을 제주로 파견하여 노씨부인을 모셔오라고 하였고, 삼남의 감사에게는 노씨부인을 호행(護行)하도록 하였다.

제주에 있을 때 집 주인 전량(全良)도 노씨부인과 동행하여 상경하였는데, 인조노씨부인을 잘 보살펴 준 은인이라 하여 많은 상을 내리고 첨사(僉使)에 임명하였다. 노씨부인을 박해한 제주목사 양호가 파직되어 온양에 이르렀을 때, 남일(南佾)이 탐적(貪賊)과 읍기(邑妓)의 두발을 자른 잔학 죄를 물어 머리를 베었는데, 그 머리를 제주로 보내 관리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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