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365
한자 金文準
영어음역 Kim Munjun
이칭/별칭 목우(木牛)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허호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가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성별
생년 1893년(고종 30)연표보기
몰년 1936년연표보기
본관 김해
대표경력 중앙보통학교 교장|오사카조선인노동조합 위원장

[정의]

1919년 제주3.1운동을 주도했던 항일운동가.

[개설]

본관은 김해. 호는 목우(木牛). 아버지는 김중진(金重珍)이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1910년 3월에 사립 의신학교(義信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12년에 제주공립농업학교(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였다.

1915년에는 경기도 수원의 조선총독부 수원고등농업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졸업 동기생으로 백남운(白南雲)[1895~1974]·이훈구(李勳求)[1896~1961] 등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같은 해 3월에 경기도 수원의 권업모범장에 취업하였다.

이후 1918년 4월까지 정의공립보통학교에서 2년 6개월 동안 근무하였으며 공립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에 있는 중앙보통학교(중앙초등학교의 전신)에서 근무하였으며 1925년 3월부터 1927년까지 교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 제주3.1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9월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산하 오사카조선인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또 일본 화학노동조합 오사카지부, 서부전기노동조합 등 각종 노동조합을 결성해 파업을 주도하고,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였던 신간회 오사카지부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9년 가을에는 오사카 치안당국이 김문준의 우수한 지도로 오사카 조선인노동조합이 1만 7천여 명의 조합원을 가지게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문준은 1929년 7월에 제주도 출신 소년들을 중심으로 오사카 조선소년동맹을 조직하였고, 일본 선박업자들의 횡포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배로’라는 구호 아래 제주 출신인이 오사카와 제주를 왕래하기 위해 제주통항조합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1930년 4월에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복목환(伏木丸)이 취항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오사카조선인노동조합의 북부지부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오사카 화학노조로 해소하고 같은 해 5월에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로 바꿔 책임자가 되었으며 오사카지부의 선전물이었던 『뉴스』 및 격문과 『제2무산자 신문』 등을 배포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본공산당의 확대 강화를 지도하였으며 한글신문이었던 『민중신문』을 발행하였다.

1930년에는 오사카 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다가 검거되어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으며 1932년 4월에는 오사카공소원에서 2년 6월을 선고받아 사카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한편 투옥 중에는 조몽구(趙夢九)[1908~?]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화학노조 오사카지부 책임자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일제 경찰은 “1930년 8월 17일 오사카에서 천호모공장 쟁의 비밀지도부 회의 중 거괴(巨魁) 김문준(당시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 상임) 등 조선인 5명과 일본인 3명을 검거하였다.”고 밝힐 정도로 김문준을 높이 평가하였다.

출감 후인 1935년 6월 15일에는 오사카에서 한글신문이었던 『민중시보』를 창간해 조선인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옹호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후 1936년 5월 25일에 수감 생활 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오사카 도네야마치료소에서 치료 중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일본인 좌익단체와 합동으로 치렀고, 일본 노동운동가들이 김문준 시신을 제주도로 운구하겠다고 하자 일제 경찰이 막을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현재 제주시 조천읍 조천공동묘지에는 당시 일본에서 보내온 비석이 서 있다. 비문은 고순흠(高順欽)[1893~1977]이 썼으며, 김문준의 문하생이었던 김광추가 대표로 운구위원이 되어 조천으로 유해를 옮겨 도민장(島民葬)을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으로 조천리 민장으로 결정하고 안세훈(安世勳), 김유환, 김시용 등이 당시 일본에 있던 고순흠과 연락을 취하면서 1937년 3월 25일에 조천공동묘지에 김문준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김문준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조선인들을 위해 노동조합 운동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여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 노동운동가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탁월한 노동운동가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 압박에 투쟁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에 기여한 인사들을 위해 오사카성[大阪城] 공원에 현창대판사회운동지전사(顯彰大阪社會運動之戰士)라는 비가 세워졌는데, 이 비에 김문준·조몽구도 일본인과 함께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활동이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2000년 8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