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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354
한자 金萬石
영어음역 Kim Manseo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허호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성별
생년 1885년(고종 22)연표보기
몰년 1909년(순종 3)연표보기

[정의]

조선 말기 때 제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선비.

[활동사항]

당시 의병장이었던 고사훈(高仕訓)[1871~1909]은 1908년 7월에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당시 제주군수였던 윤원구(尹元求)로부터 전해 듣고 의병 활동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석윤(金錫允)[1877~1949], 노상옥(盧尙玉)과 함께 제주읍 이도리 광양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는 한편 황사평에서는 비밀리에 훈련을 추진하고,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제주읍 이도리 동광양 출신의 김만석고사훈이 1909년 2월 25일(음력 2월 6일)에 이도리 광양의 조병생(趙丙生)의 집에서 창의의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할 때 참가하였다. 당시 1909년 제주의병의 창의자는 모두 10명이었으며, 이 자리에서 거사 날짜를 1909년 3월 3일(음력 2월 12일)로 하고, 장소는 관덕정(觀德亭)으로 결정하고 창의에 필요한 격문과 통문을 작성하였다. 제주도민들에게 격문과 통문을 사발통문으로 보내고 김만석고사훈·조병생·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 등과 함께 당일 대정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제주성에 집결하면 이중심·김석윤·노상옥·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한영근(韓永根) 등이 제주성 안에서 호응, 기병을 하여 결전을 벌여 일본인들을 모조리 축출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영락리에서 100여 명, 신평리에서 100여 명 및 대정성 북문 밖의 마을에서 수십 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2월 28일에 대정군 중면 광청리에 집결하였다. 이에 제주경찰서 대정주재소는 3월 1일에 광청리 민가를 습격하여 고사훈김만석을 체포하였다. 3월 4일 오전 고사훈김만석은 서귀포주재소로 출발하려 할 때 포승을 끊고 감시하는 간수와 순사를 쓰러뜨리고 달아나다가 대정성 동문 밖 400~500미터 지점에서 한국인 순사에 의하여 사살되었다. 김만석은 안성리 주민들에 의해 이른바 돌동산에 가매장되었다.

의병장이었던 고사훈과 의병이었던 김만석의 창의는 비록 거사를 실행하기 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제주 지역에서는 조선 말기 최초의 의병운동이었다.

[묘소]

김만석의 유해는 1977년에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남쪽 기슭에 있는 모충사(慕忠祠)로 안장되었고, 가묘(假墓)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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