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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333
한자 金坵功德碑
영어음역 Kim Gu Gongdeokbi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 for Kim Gu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3동 2505[일주동로 293-1]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순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공덕비(公德碑)
건립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관련인물 김구(金坵)
높이 173㎝
너비 59.5㎝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3동 2505[일주동로 293-1]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고려 후기 제주판관(濟州判官) 김구(金坵)의 공덕을 기리는 비.

[개설]

김구의 본관은 부안이며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고려시대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과 제주판관이 되었다. 원종 때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어 원나라와 관련한 문서 관계 일을 하였다.

제주민속박물관 관장이었던 진성기(秦聖麒)가 글을 짓고, 후예인 김세길(金世吉)이 글을 썼다.

[형태]

비신(碑身)의 너비는 59.5㎝이고 두께는 30㎝이며 전체 높이는 173㎝이다.

[금석문]

앞면에는 “돌 문화의 은인 판관김구선생공덕비(判官金坵先生功德碑)”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 기록된 것은 다음과 같다. (왼쪽으로부터) “어 모아 경작지의 경계선을 만들고 집집마다 돌담을 쌓아 두르도록 하였다. 이렇게 새로 쌓은 밭담과 집의 울담은 소유하고 있는 땅의 경계 표시가 되어 서로의 다툼을 없애주는 구실을 해주었고 소와 말의 침입으로부터 농작물이나 울안을 보호하는 방법이 되었다.

또한 방풍의 구실도 해주어 풍다(風多)로 인해 바람의 피해를 입어오던 제주도로선 돌의 처리로 말미암아 농토도 넓어지는 효과를 얻었으니 선생(先生)의 돌 처리 방법으로 도민들로서는 실로 일석사조의 혜택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돌을 이용한 생활 도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으니 이 무렵을 전후하여 돌그릇이나 돌의 연모도 보다 정제되기에 이르렀으며 오늘날 제주 풍물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는 정주먹도 이 무렵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생은 고려 조정에서 보내오신 최초의 제주판관으로서 선정하신 다음 한림원으로 전임되셨고, 뒤에 평장사에 이르신 어른이시며 부안 김씨(扶安金氏)의 중시조(中始祖)이시다.

선생은 3611년 충렬왕 4년 68세로 별세하시니 조정에서는 시호 문정(文貞)를 내리시고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배향하였다. 선생의 위민 정신과 창의적인 돌 문화의 내력은 제”(오른쪽으로).

왼쪽에 기록된 것은 다음과 같다. “지포 김구 선생(止浦金坵先生)은 고려 고종 17년 단기 3567년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여 5년간 재임하시는 동안 많은 선정을 베푸신 가운데서도 특히 제주 삼다(三多)의 하나인 돌을 잘 다스려 돌 문화의 은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오랫동안 칭송되어 오는 어른이시다.

선생의 판관 부임 당시 제주도는 돌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 농토의 이용률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경작의 경계가 없어 이웃간에 다툼이 많았고 또 가축을 놓아 기르다 보니 가축의 침범으로 인한 피해가 많아서 농사에 많은 불편이 있었다. 이러한 일들을 보신 선생께서는 돌을 주”(뒤쪽으로 이어짐).

오른쪽에 기록된 것은 다음과 같다. (뒤쪽에 이어) “주민의 삶의 역사와 더불어 길이 남아 향기로우실 것이다.

단기 4324년 유월 일 제주민속박물관 세움.

제주민속박물관 관장 진성기(秦聖麒) 글, 원광대학교 후예 김세길(金世吉) 씀, 부안 김씨대종회 협찬”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2.05
김** 조선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임 2013.01.30
김** 조선시대가 아니고 고려시대임 201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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