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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환 씨의 일상생활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4021
한자 -日常生活-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집필자 김동윤

집 구조의 변천

강덕환이 어렸을 때 살던 집에는 처음엔 ‘안거리(안채)’ 하나밖에 없었다. ‘밖거리(바깥채)’는 마차와 소가 있었는데, 식구가 불어나면서 살림집으로 꾸며 살았다. 밖거리가 살림집이 되자 소는 ‘목거리’를 새로 만들어 키웠다. 그의 집에는 많을 때는 여섯 마리까지 소를 키웠는데, 그 때는 외양간이 두 채 있기도 했다. 특히 그의 집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따서 먹기도 하고 갈옷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의 집에 풋감을 사러 드나들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어머니·아버지·동생이 ‘큰구들(큰방)’에 살았고, 할머니·형·그는 ‘작은구들(작은방)’에 살았다. 그러다가 그가 중3 되던 해인 1976년 밖거리에 방을 만들어 갔다. 고3 땐 안거리를 현대식으로 개조하였다. 원래 초가 지붕이었는데 1976년 경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꿨다. 그때 형이 외삼촌이 운영하던 삼성서점에서 숙식하면서 일하였기 때문에 그는 동생과 함께 작은방을 썼다. 누나는 안거리에서 살았다. 그때는 할머니도 세상을 떠난 시점이었다.

동쪽으로 인접하여 있던 옥자네 집은 아버지 땅에 지은 집이었다. 현재의 아버지 집은 옥자네 집 위치에 자리잡았다. 옥자 누나는 고모 딸이다. 그 고모는 원래 고모가 돌아가시자 후처로 온 사람이며, 옥자 누나는 그 고모가 데리고 온 딸이다. 아버지는 “누님, 누님” 하고 부르며 그 고모와 가까이 지냈다. 그래서 거기에 집 짓고 살게 했던 것인데, 마을이 급격히 개발되면서 딴 데로 이사 갔다. 그 이후에 아버지가 옥자네 집터에 집을 지은 것이니, 그때가 1989년이었다.

두 칸짜리 집이었다

두 칸 짜리 집이었다. 한 쪽은 구루마(마차) 보관용으로 사용했고, 다른 한 쪽은 창고였다. 이 창고는 석공일을 하던 아버지가 겨울철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연장을 벼릴 때 작업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대장간처럼 말이다. 이 때는 같이 석공 일을 하는 동네 사람들도 같이 모여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대나무 울타리

안거리 뒤쪽으로 대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대나무는 바람막이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생활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베어 자른 후에 ‘적꽂이’를 만들기도 하고 ‘체’(삼태기)를 만드는 데 쓰기도 했다. 빗자루도 만들고, 초가집 거왕을 매는 데도 쓰였다. 대나무 울타리는 통시 뒤편에도 있었는데, 그것도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

호롱불과 등핏불과 전깃불

다랑굿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강덕환이 5학년 끝나 6학년 올라가던 시기, 즉 1973년 초였다. 그때 그의 담임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 가면서 “이제는 노형에 전기도 들어올 것이니 6학년이 되면 공부 열심히 해라” 하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 전엔 호롱불과 등핏불에 의존했다. 주로 호롱불은 부엌에서 썼고, 등핏불은 방에서 썼다. 연동의 성가에 제사 지내러 밤길을 갈 때면 창호지를 이용해서 호롱불을 만들어 들고 가곤 했다. 등핏불의 유리를 ‘호야’라고 불렀는데, 그을음이 낀 그것을 닦다가 깨먹기도 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날이 어두우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배가 고팠던 기억이 있다. 그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산 것은 1976년 중 3때였다. 그 전에는 다른 집에 가서 시청했다. 마을에 텔레비전을 처음 갖춘 집은 정미소를 운영했던 집이었는데, 그 수상기는 일본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프로권투나 프로레슬링 중계 등을 재미있게 보았다. 손발 검사를 거치고 나서야 들어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시장 보기·일상 음식

강덕환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육류, 어류, 채소류 등 골고루 섭취하는 편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돼지고기, 쇠고기 등 네발 달린 가축의 고기는 먹지 못했었다.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술안주 등으로 조금씩 먹다보니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또한 국이나 찌개류는 즐겨 먹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아들들은 국이나 찌개를 잘 먹어 밥상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오른다. 밥상은 아내가 차리고 그나 큰아들이 조금씩 도와준다. 시장은 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이마트를 이용한다. 한국물류나 런던물류 그리고 패밀리마트 등 가까운 마트도 이용한다. 민속오일시장도 인근에 있어서 거기에도 자주 가는 편이다. 그는 가끔 아내와 함께 시장에 간다.

‘빙떡’과 ‘오메기술’도 있었던 제수 음식

강덕환의 집안만의 특별한 제수 음식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 설 때는 빙떡을, 그리고 추석 때는 곤떡(송편)을 빠뜨리지 않고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직접 만들기보다는 주로 떡방앗간에서 마련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할머니가 함께 살 때는 오메기술도 마련했다. 어머니는 직접 좁쌀가루로 오메기떡을 만들고, 그것을 쪄서 짓이겨서 항아리에서 발효시켰다.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세배 올 때 내놓기 위해서 많이 담아 놔두었다. 기름이 둥둥 뜨면 그것을 걸러낸 후 술을 주전자에 담아 두고, 밑에 가라앉은 것은 소도 먹였다.

어머니는 설 때면 메밀묵과 빙떡을 꼭 마련해서 올렸다. 추석 때는 동그란 송편을 올렸는데, 솔잎을 따다가 집에서 쪄서 송편을 만들었다. 백설기 같은 것은 시루에 쪄서 만들었다. 콩나물도 집에서 키워 만들곤 했다. 며칠 키우면 어느 정도 자라서 먹을 만하게 되었다. 고사리도 꺾어서 말려두었다가 제사 명절 때 쓰곤 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이제 옛일이 되었다. 떡은 방앗간에서, 콩나물과 고사리 등은 마트에서 구입하게 된 것이다.

제사상 차리기

강덕환 집에서 요즘 제사상에 진설하는 방식은 제주도 민가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대로 한다. 병풍을 둘러치고 그 앞에 제사상을 놓는다. 제사상 맨 안쪽으로는 지방을 놓고, 지방과 인접하여 메와 갱을 올린다. 그 앞으로는 적, 묵, 채소, 전, 떡과 빵을 진설하고, 맨 바깥쪽으로는 과일들을 올린다.

메(밥)는 흰쌀밥으로 올리며, 갱(국)은 옥돔미역국이나 쇠고기무국을 주로 올린다. 적은 쇠고기, 돼지고기, 오징어를 올리며, 묵은 주로 메밀묵으로 올린다. 전은 두부, 소시지, 버섯, 호박전 등을 올리고, 채소류로는 콩나물이나 숙주나물, 고사리, 시금치, 잡채를 올린다. 떡은 송편, 인절미, 백설기 같은 것으로 올리고, 카스테라 같은 빵도 올린다. 과일은 사과, 배, 감, 귤, 포도, 바나나 등을 올리는데, 가지 수를 반드시 홀수로 하여 홍동백서로 진설한다.

의생활

어렸을 때는 설 같은 명절 때 어머니가 새 옷을 사주곤 하였다. 형 옷을 물려받아 입는 경우도 많았다. 할머니가 지어주는 옷을 입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교복, 체육복에다 트레이닝복이나 청바지 등을 주로 입었다. 고등학교 때는 교련복을 입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유명 메이커의 옷을 사 입거나 하지 않았다. 대학 때도 티셔츠, 남방셔츠 위에 점퍼를 걸치고 바지는 청바지를 많이 입었다. 요즘 직장에 나갈 때는 노타이 차림의 양복을 입고 나가는 경우가 많고, 필요한 경우에는 넥타이를 매기도 한다. 점퍼 차림으로 출근할 때도 있다. 각종 모임에 나갈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복은 본인 결혼식 때 외에는 입어보지 않았다. 어렸을 때에도 한복을 입은 기억이 없었다.

신발의 경우, 어렸을 때는 주로 고무신을 신었다. 중학교에 가면서 본격적으로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지금은 구두를 많이 신고, 경우에 따라 단화나 운동화도 신는다.

여가 생활

강덕환은 여가가 생기면 가족과 함께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많다. 4·3문화예술제, 입춘굿놀이 등의 문화 행사에 가족을 데리고 다니곤 한다. 그는 오름에 자주 다니는 편이다. 가족과 함께 가기도 하고 몇몇 뜻맞는 이들과 함께 오르기도 한다. 특별한 기행 프로그램이 있을 때 참여하기도 한다. 혼자서는 잘 가지 않는다. 오름에 가면 움푹 팬 분화구가 어머니 품속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오름 기행에서 시상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람들과 만나 술을 마시는 일도 많다. 술 마시면서 세상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의 삶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시인인 그에게 이런 여가 보내기는 창작에 활력소가 된다. 오름이나 행사에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상을 떠올리고 가다듬는다. 그는 그동안에 쓴 시들을 모아 제2시집을 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연날리기 - 연의 종류

강덕환이 날리던 연의 종류에는 ‘꼴랭지연(가오리연)’과 ‘장연(방패연)’이 있었다. 요즘 나오는 다양한 다른 것들은 있는 줄도 몰랐다. 장연은 꽤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고작해야 꼴랭지연을 만들어 띄웠다. 연을 만드는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라 재료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창호지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어려웠다기보다 창호지를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할망당 같은 데 가서 지전으로 쓰인 창호지를 떼어다가 사용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다 쓴 공책의 가운데 실밥을 뜯어서 이어 붙여 쓰기도 했고, 철 지난 달력을 모아두거나 시멘트 포대 종이를 이용하기도 했다. 마분지 종이도 더러 쓰기도 했지만 얇아서 자주 찢어졌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는 않았다.

대나무는 집집마다 울타리 뒤란에 많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구하는 데 어렵지는 않았다. 인근 밭에도 대나무가 많았다. 연 만드는 용도로 몇 개 베어간다고 해서 탓하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 집 뒤란에도 심어져 있어서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대나무는 여린 대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오래된 대를 이용해야 한다. 탄력이 강하고 질기기 때문이다. 실이 필요했으나, 그것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할망당에 가서 떼어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불 호청을 뜯을 때 조각난 실을 이어 묶어 연줄로 사용하였다. 그 다음 얼레가 있어야 한다. 얼레는 짝얼레, 통얼레가 있었다. 통얼레는 만들기도 어렵고 해서 아이들은 주로 짝얼레를 만들어 사용했다.

연싸움의 추억

연을 만들고 바람이 잘 부는 언덕배기로 나간다. 바람의 방향을 고려하여 나뭇가지 등에 연줄이 걸리지 않도록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옆 친구들과 엉키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연싸움을 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연싸움은 연줄을 서로 엉키게 하여 누구의 연줄이 먼저 끊어지느냐 겨루는 것이다. 이 연싸움에 이기기 위해서 연줄에 밥풀을 먹이기도 하고 심지어 등피 호야를 빻아 얇은 유리가루를 밥풀과 짓이겨 연줄에 바르기도 했다. 이 때 조심하지 않으면 손이 베여 다치기도 한다. 연줄을 걸고 싸움을 하는 것을 ‘타발을 건다’거나 ‘붙인다’고 했다. 타발을 붙여 한참 연싸움을 하다 가끔 연줄을 확 잡아당기기도 한다. 이것을 ‘택결’을 준다고 했다.

연싸움 끝에 연줄이 끊겨 멀리 날아가는 것을 ‘낙하라’ 간다고 했다. 연줄이 끊긴 아이는 그 연을 잡으려고 밭담을 넘고 열심히 쫓아가서 다시 연을 주워 와야 했다. 너무 멀리 날아가 버리면 영영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싸움이 아니더라도 갑자기 불어치는 바람에 감장 돌다가 나뭇가지에라도 걸리면 찢어지고 엉켜 포기해야 했다. 연도 잃고 실도 잃어 빈 얼레만 들고서 터덕터덕 되돌아올 수밖에 없으면 어린 마음에도 허망감에 빠졌다.

연줄에 편지를 실어 보낸다는 놀이도 있었다. 종이를 연실에 묶어 ‘택결’을 주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연실을 타고 종이가 올라갔다. 어떤 때는 자기가 바라는 사항을 종이에 적어 보내면 소원이 이뤄진다고도 했다. ‘건강’이라고 써서 보내기도 하고 ‘감기에 안 걸리기’, ‘싸우지 않기’, ‘공부 잘하기’ 등을 써 넣었던 기억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사랑’이나 ‘행복’ 등의 말은 어려웠던지 썼던 기억이 없다고 한다. ‘돈 많이 벌기’도 없었던 것 같다고 한다.

새해 정월 대보름이 넘도록 연을 날리는 것은 아니라고 어른들이 얘기했다. 그러면 자기가 날리던 연을 멀리 날려버리는 의식이 있었다. 이 때는 ‘버리줄’ 근처 연실에 불이 붙은 숯동가리를 묶어 연을 날린다. 숯이 다 타들어 갈 즈음 연실을 끊고 연은 멀리멀리 날아간다. 이 때 조심할 사항이 있다. 타들어 간 숯이 떨어지면서 초가지붕에 닿아 불이 날 위험이 있다. 실제로 그는 그런 일을 목격한 일이 있다고 한다.

제기차기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삼세가지’와 ‘니뿐이’이며, 이러한 놀이 외에도 서로 마주서서 주거니 받거니 제기를 차기도 했다.

① 삼세가지

한 쪽 발로 제기를 차서 그 숫자를 센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한 쪽 발을 들고 찬다. 마지막으로 양쪽 발을 번갈아가면서 찬다. 이 세 번의 과정을 거치며 제기를 찬 숫자를 합산하여 상대방과 내기를 하는 것이다.

② 니뿐이

이 놀이는 제기차는 아이들이 많을 때 편을 갈라 하는 놀이다. 먼저 몇 개까지 찰 것인가를 정하고, 위의 삼세가지를 끝내면, 제기를 자기의 키보다 더 높이 올려 차야 하는 과정과 제기를 차고 입으로 물어야 하는 과정이 덧붙여진다.

그런 후에 줄을 긋고 그 안으로 차 넣어 일정한 점수까지 도달해야하는 놀이다. 이 때 ‘몇 년을 간다’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내기에서 이기면 어디에서 어디까지 업어주기, 또는 다마(구슬)내기, 빳찌(딱지)내기를 한다. 더러는 돈내기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명절날 세뱃돈 받아서 주기 식의 내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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