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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할아버지의 생애사와 성장 과정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1006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집필자 문순덕

생애사

김홍식(金洪植)[1929. 5. 11.(양)~, 78세]은 1929년에 제주시 아라동에서 태어났지만 북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이도동으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1957년에 결혼하면서 지금까지 묵은성에서 살고 있다. 슬하에 3남매(2남1녀)가 있으며 1957년부터 1995년까지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2005년에 『삼도2동마을지』발간에 관여했으며, 현재 삼도2동 원로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점은 김홍식은 대학교수여서 그런지 예비 질문지에 나름대로 대답을 정리해 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서 말을 할 때 실수하지 않고 필요한 내용만 전해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부부의 대화 중에 김금심은 남편이 말을 하면 차분하고 조용히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수정하거나 보충해 주기도 했다.

김홍식은 조사자의 대학교 은사님이며 약 26년 동안 가끔씩 드나들었던 집이어서 정감이 있었다. 오래 다니다 보니까 주변 환경은 변하는데 김홍식 집과 이웃한 몇 집만 옛 모습 그대로였다. 조사자는 김홍식과 잘 아는 사이여서 편안하게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 인터뷰 후에 옛 사진첩을 꺼내서 자료화할 만한 것들을 보는데 정말 귀중한 사진들이 많이 있었다. 1920년대 조부모 사진, 1950년대 혼례 사진, 1960년대 이후 육아사진, 사회활동 사진 등 자료가 아주 풍부했다.

출생

김홍식은 원래 1929년생인데 1년 늦게 신고 되어서 호적에는 1930년생으로 올라 있다. 부친이 전남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김홍식의 기억에 큰아버지가 늦게 출생신고를 했다고 보았다. 또한 옛날에는 아이가 태어나도 질병 등 2~3년은 불안한 시기여서 건강하게 자랄 것 같으면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요즘처럼 출생신고에 대한 의무감도 없었고 벌금도 없었다. 김홍식이 태어날 때는 제주면이었고 북소학교 시절에는 제주읍이었다고 한다. 관덕정 서쪽에 제주면사무소가 있었다. 김홍식 부친은 김영린(金永璘)[제주도 초대 도의원을 지냄. 자유당 제주도당 위원장이었었음. 1976년 사망함]이며, 모친은 오효현(吳孝賢)이고 7남매(3녀4남) 중 맏이이다.

일제강점기 공교육기관(제주공립보통학교)

김홍식의 본적은 원래는 제주시 아라동인데 지금은 제주시 일도동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김홍식은 아라동에서 한 7살까지 살다가 학교에 입학(1938년)하기 위해서 일도동으로 내려왔으며, 아라동에는 초등학교가 없었다. 그 당시 김홍식 부친(일본에서 법대를 졸업했음)은 광주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고, 제주시 아라동에서 어머니와 지내다가 초등학교 입학을 기회로 번화가로 내려왔다. 지금은 제주시가 확장되면서 아라동에 거주 인구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웃드르(중산간마을)에 해당하는 시골 농촌이었다. 아라동에서 제주역사 1번지로 내려와서 맨 처음 정착한 곳이 이도동(현재 중앙성당 동쪽임)이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이 다니던 학교는 보통학교(초등학교), 고등보통학교(중고등학교)라 하고, 일본사람들이 다닌 학교는 소학교, 중학교라 불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를 구분하지 않고 ‘국민학교, 중학교’로 불렀다(보통학교→소학교→국민학교(태평양전쟁 말엽)→초등학교(1996년)). 일제강점기에는 소학교 입학이 의무교육이 아니고 지원자도 많아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김홍식 부친은 북소학교에 가서 면접(부친 성함, 거주지 등)을 봤는데 떨어지는 어린이도 많았다고 한다.

제주북소학교 시절 교과서

김홍식은 제주북소학교 3학년까지는 조선어를 배웠는데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였고, 선생님이나 학생들도 신나게 배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니까 이 시간도 없어지고 5학년이 되니까 완전히 일본어 사용(국어 사용)만 강요했으며, 한국말을 쓰다가 발각되면 처벌을 받는 등 무서운 분위기였다고 한다. 집에 와서는 부모들이 한국말을 쓰니까 같이 사용하지만 학교에서는 완전히 일본말만 사용했다. 조선어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상, 화학은 일본책이어서 그것도 번역해서 사용하고 국어독본을 임시로 만들어 쓰는 정도였다고 한다.

제주 삼성혈에 소풍과 운동회

김홍식이 제주북소학교 1학년 때 소풍 코스가 삼성혈로 소풍을 갈 정도로 멀리 있게 느꼈다. 소학교 소풍 때(일정 때니까 원족이라 했음) 도시락이라 해도 쌀밥 정도였다. 일제강점기에 소풍갈 때 도시락이 없는 학생은 그릇에 음식을 담고 보따리로 싸서 허리를 묶었다. 용돈은 5~10전을 받아서 사탕과 과자를 사 먹었다고 한다.

"우리시대만 하더라도 그 때 주식이 좁쌀, 보리쌀을 먹을 때여서 쌀을 조금 놓은 보리밥을 싸가니까 쌀밥을 쌀 수도 없었지만 친구에게 미안해서 이런 점심을 먹을 수도 없었어요."

제주북소학교 운동장이 작은 건 아니지만 학생수가 워낙 많고, 운동을 하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일제강점기에 독지가가 지금 시청 근처에 공설운동장 부지를 기부했다고 한다. 2천~3천 평 정도였는데 원래는 제주북소학교 운동장으로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제주시 공설운동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북소학교 운동회는 제주시 체육대회나 다름없어서 온 가족이 점심을 준비해서 등에 지고 운동장에 갔다고 한다. 여러 가지 운동회 기구를 차를 빌려서 운반해 가고 아라, 오라, 영평, 노형, 화북에서도 제주북소학교를 다녔으니까 학생들이 공설운동장으로 걸어서 왔다. 나중에 공설운동장은 다른 용도로 쓰이면서 제주시 전농로(한국통신과 한국토지개발공사 서북쪽)에 있던 제주농업고등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운동회를 했다고 한다.

귀중품이었던 운동화와 목감보의 착용

김홍식은 일제강점기 말에 국민학생이었는데 그 당시는 생활필수품이 아주 부족했다. 신발도 배급제여서 고무신도 귀했지만 운동화는 더욱 귀한 물건이었다. 모든 학생이 다 받는 것이 아니고 한 학급에 몇 켤레씩 배정이 되었는데 김홍식이 소학교 3학년 때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가보니까 배급표를 줘서 상점에 가서 운동화를 샀다. 그런데 아주 귀한 물건이어서 하룻밤 안아서 잠을 자고 신이 닳아질까 봐 마음 놓고 신지도 못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신발이 귀할 때니까 부모들은 아이들이 한창 바깥에서 놀 때 “야, 그 신 닳암저.” 하면서 뛰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학생들도 몸빼를 입었고, 머리에는 목감보를 썼다. ‘목감보’는 일본식 모자인데 방석 모양으로 솜을 넣고 만든다. 천은 다양하지 않아서 흰색이나 검은색을 이용했다. 모자에 조임형 끈이 달려 있어서 추울 때는 방한모가 되지만 전시에는 얼굴에 파편이 날아오지 못하도록 방어벽의 구실도 했다고 한다. 즉 전시 중에 방한용 모자를 썼는데 요즘 같으면 솜방석을 뒤집어 쓴 형태이며 공습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모자를 눌러 썼다고 한다.

남소학교와 병설 고등과, 간이학교와 소학교

남소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이 많이 다니고 북소학교는 한국사람만 다녔다. 김홍식의 기억에 따르면 그 당시 제주읍 외에 한림에도 동소학교 서소학교가 있어서 동소학교는 주로 일본사람만 다녔다고 전해주었다.

남소학교의 역사를 좀 더 살펴보자. 6학년을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은 남소학교 병설 고등과가 있어서 거기로 진학을 했다. 이를 고등소학교라 부르며 2년제였다. 남소학교에는 일본사람이 다니는 고등과가 있었으며, 한국인도 북소학교를 졸업하고 남소학교 병설 고등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 제주읍에는 농업학교 하나뿐이어서 고등과에 입학하기도 아주 어려웠다고 한다. 제주읍에 공립학교로는 제주북소학교 하나밖에 없었고, 제주시 화북에 화북소학교가 있었는데 그건 사립학교였다. 남소학교도 사립학교였지만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이어서 한국인의 입학 기회가 없었다.

제주시 다섯 마을(일도, 이도동, 삼도동, 용담동 등) 거주자들은 거리상 가까우니까 우선 제주북소학교에 들어 올 수 있었지만 남촌 근방인 아라, 오라, 연평, 봉개, 삼양 거주자들은 어릴 적에는 북소학교에 입학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원하는 사람 누구나 북소학교에 취학이 가능하지 않았고 선택적으로 입학을 허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취학 연령도 많아지니까 아쉬운 대로 주변 마을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마을마다 야학이 있었다. 부녀자나 정식으로 소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남자 어린이들이 주 학생이었다. 남자는 대부분 초등교육이라도 받았는데 여자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었으며, 야학에 다닌 여학생들도 소수였다고 한다. 사숙은 3~4년 학제이며 자연부락에는 하나씩 있었다. 1930년대 초반에 아라3동 이숙이 있었다. 사숙이 당시에는 소학교라고 했는데 그게 정식으로 6년제 학교가 아니라 3년 과정, 4년 과정이었다. 예를 들어 아라동에 아라3동 이숙이라고 1930년대 중반쯤에 생겼는데 정식 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학생이나, 입학 적령기를 놓치면 사숙에 다녔다. 아라동인 경우는 4년제 사숙을 졸업하면 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공립학교에서 안 받아주니깐 사립 보통학교(그 당시에 화북초등학교)에 편입학을 하고 6학년 졸업을 하면 제주농업학교 진학시험을 보는 등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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