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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650
한자 三別抄-抵抗址濟州-
영어음역 Sambyeolchoui Majimak Jeohangji Jeju Hangpadur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동전

[처절한 항쟁의 섬 제주]

천혜적인 수려한 자연 경관으로 제주도는 일생에 한 번은 꼭 찾아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로 꼽히는 ‘환상의 섬’이다. 21세기 해양 시대를 맞아 세계의 많은 학자들은 소위 베세토(beseto) 라인의 중심축에 제주가 위치하고 있어 동북아시아의 중심 지역으로 제주가 부상할 것이라 예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주의 이면에는 제주인들의 처절한 항쟁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항쟁의 대상은 목민관으로 제주에 파견되었던 관리와 외세(外勢)였다. “제주목민관을 한 번 역임하고 나면 3대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말은 목민관들의 자의적인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반영해 준다.

고려 후기 제주 농민들의 항쟁을 비롯해 19세기에 끊임없이 제주에서 전개된 민란들이 바로 그렇다. 이러한 역사성에 기인하여 제주인들은 제주 출신 이외의 국내인들을 ‘육지인’, ‘육지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제주는 외세의 끊임없는 침탈에 시달려야 했다. 몽고의 침입 외에도 왜구의 빈번한 침입, 한말 일본 어업의 침탈, 천주교를 등에 업은 프랑스 세력의 침탈, 해방 직후 4·3사건 등 국내 세력과 결탁된 외세 세력들이 제주인을 괴롭혔다.

이에 제주인들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반외세 및 반정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제주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반외세 운동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고, 그 결과 몽골·중국·일본·미국에 의존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개경 환도에 반대해 대몽 항쟁을 전개하던 삼별초가 강화도·진도에 이어 제주에 들어와 항쟁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1270년(원종 11) 이었다. 세계 대제국의 꿈을 꾸고 있던 몽고가 남송(南宋)과 일본 정벌을 위해 그 중간적 위치에 있는 제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삼별초는 제주에서 제주인들과 함께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몽고는 그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주에서 항쟁을 전개하고 있는 삼별초를 토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273년(원종 14) 여몽연합군에 의한 삼별초 토벌은 그 후 약 100여 년간 제주가 몽고의 직할 통치 하에 놓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삼별초의 대몽 항쟁과 일본에의 군사 지원 요청]

당시 몽고의 궁극적 목표는 남송을 정벌하는 것이었지만, 몽고는 고려가 남송과 연합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몽고의 고려 침입은 고려를 직접적으로 정복할 의사였다기보다는 고려가 남송과 연계하는 상황을 미연에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자 고려 무인 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대몽 항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려 내에서는 왕과 무인 정권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원종과 문신들이 서로 연합하여 몽고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무인 정권으로부터 잃어버린 왕권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원종은 강력한 몽고에 의존하여 국내에서의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마치 자기 집안 문제를 다른 집안의 도움을 얻어서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럴 경우 집안 문제의 해결은 본인의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왜곡된 방향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의 삼국통일이 당나라의 동진 정책에 휘말려 불완전하게 이루어진 점, 대몽 항쟁의 실패, 동학농민전쟁의 실패, 해방 후 자주독립국가의 실패는 모두 외세의 개입으로 인한 왜곡된 결과였다.

몽고는 그들에게 대항하고 있는 무인 정권이 제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무인 정권의 몰락 없이 고려 원종이 몽고와의 강화를 맺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려 국왕의 지위가 원(이하 몽고로 통일) 세조의 지원으로 확고해지자 원종은 무인 정권에게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임유무 정권은 이를 반대하면서 저항하다가 1270년(원종 11)에 살해됨으로써 무인 정권은 붕괴되었다.

무인 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삼별초는 처음에 원종과 비밀히 연계된 홍문계(洪文系) 등에게 회유되어 임유무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동조하였다. 그러나 개경 환도가 결정되자 삼별초 군대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삼별초 중 신의군은 전쟁 중에 몽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반몽적 성격이 강하였다.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출륙을 거부하자, 원종이 보낸 군대는 강화도에 와서 1270년 5월에 삼별초를 공식적으로 혁파하고 명부를 가지고 가버렸다. 이에 삼별초는 몽고에 대항함으로써 자주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물론 명부가 몽고에 넘겨지면 목숨을 보전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사실도 한 몫하였을 것이다.

삼별초는 1270년 6월 1일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몽고에 대한 반외세, 개경 정부에 대한 반정부 항쟁을 전개하였다. 대다수의 농민들은 삼별초의 대몽 항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1270년 6월 3일에 1만여 척의 배로 강화도를 출발한 삼별초 군대는 8월 19일에 항쟁 거점지인 진도에 도착하였다. 삼별초는 남쪽 지방의 조세를 개경으로 운반하는 조운선 차단 및 제해권 장악을 위해 진도를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진도에서 항쟁하던 삼별초는 1271년(원종 12) 5월 초 경에 일본에 외교 문서를 보내어 군사와 군량미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과 연계해서 몽고를 견제하고자 하였지만, 일본은 동년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 논의한 결과 북구주(北九州) 지역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는 선에서 매듭짓고 말았다.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환영한 제주도민들]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몽고는 남송과 일본 정벌을 위해 중간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제주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몽고는 지리적으로 제주의 군사적인 중요성을 이미 간파하여 고려로 하여금 탐라 사신이 몽고에 입조하도록 강요하였다.

1266년(원종 7) 탐라성주(耽羅星主)는 고려 사신과 함께 몽고에 입조하였다. 그 후 몽고는 1268년(원종 9)과 1269년(원종 10)에 각각 제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사신 파견의 1차 목적은 일본과 남송 정벌에 필요한 선박의 일부를 제주에서 건조하도록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고, 2차 목적은 제주도 주변의 해로를 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삼별초의 이문경 부대가 1270년(원종 11) 10월 말경에 제주에 입도하였다. 삼별초의 진도 정부가 무너진 것은 1271년 5월 15일이었다. 그러나 김통정 등은 진도에서 항쟁을 계속하면서도 이문경 부대로 하여금 제주로 들어가 항쟁의 거점을 마련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남하할 때부터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 북구주, 오키나와, 심지어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연계하여 몽고군을 제압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정보를 고려 관군에서도 입수하고 있었다. 삼별초가 제주에 입도하기 전인 1270년 9월경에 영암부사 김수가 200명의 병사, 뒤를 이어 고여림 장군이 일부의 병사를 거느리고 제주에 들어가 있었다. 삼별초의 이문경 부대는 항쟁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이미 제주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과의 일대 항전을 치루지 않을 수 없었다.

별도천 전투 혹은 송담천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에서 이문경 부대는 제주도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군사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다. 제주도민들이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기에 가능한 승리였다. 왜 제주도민들은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인식하였을까.

무엇보다 제주도민들의 반정부적인 인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제주는 1105년(숙종 10)에 탐라국이 해체되고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지방관들은 15세 이상의 제주도 남자들로부터 해마다 콩 한 섬씩과 지방 관아의 말단 공무원들로부터는 말 한 필씩을 바치도록 강요하여 나누어 가졌다. 이러한 이유로 제주의 지방관을 한 번 역임하면 아무리 가난한 자라도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제주의 토착 세력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에게 빌붙어 제주도민들의 토지를 침탈하였다. 제주도민들은 토착 세력과 지방관에게 이중적으로 수탈당하고 있었다. 1234년(고종 21) 제주판관으로 부임했던 김구는 권세가의 토지 침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밭과 밭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한 ‘돌담’을 쌓기 시작하였다. 제주의 돌담의 유래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셈이다.

12세기 이후 지방관의 탐학과 권세가들의 횡포로 인해 제주 사회는 매우 동요하고 있었다. 결국 1168년(의종 22) 양수가 난을 일으켜 제주도민들로부터 선정관으로 추앙받았던 최척경을 다시 탐라현령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1202년(신종 5)에는 번석·번수 형제의 난, 1267년(원종 8) 봄에는 초적(草賊) 문행노의 난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중앙에서 파견되는 지방관 및 이에 결탁하는 제주 토착 세력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확산되는 가운데, 고려 관군이 제주에 들어온 것이다. 관군은 삼별초가 제주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무리하게 제주도민들을 동원하여 군기 보수 및 군기 제작, 그리고 제주도 곳곳에 환해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연일 계속되는 노역으로 제주도민들의 관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증폭되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가서 제주도민들이 싫어하는 관군을 상대로 싸움을 전개하였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삼별초를 마치 ‘해방군’으로 인식하여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김통정의 제주 입도와 삼별초의 붕괴]

1271년(원종 12) 5월 삼별초의 진도 정부가 무너지자 김통정 장군은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왔다. 그는 먼저 들어와 있던 이문경 부대와 합세하여 제주에서의 본격적인 대몽 항쟁을 전개해 나갔다. 현재 애월읍 고성리에 위치하고 있는 항파두리성을 중심으로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곳은 제주에서 천연적인 요새 지역의 하나이다. 하천과 하천을 경계로 그 안에 외성으로 토성을 쌓고, 토성 안에 내성으로 석성을 쌓았다. 외성을 토성으로 쌓은 이유는 토성 위에 재를 수북하게 쌓아 놓았다가 적이 나타나면 말 꼬리에 큰 비를 메달아 토성 위를 달리게 하여 연막전술을 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외에 애월목성 및 300여 리에 이르는 환해장성을 완성하였다.

삼별초 군대는 제주에 항쟁 근거지를 마련한 이후에도 전라도 남해안 지역까지 진출하여 조운선 및 전함 파괴, 강진 등 전라도 지역에 상륙하여 관아를 불태우거나 재물을 약탈하고, 몽고인 병사를 살해, 납치하였다. 삼별초는 대몽 항쟁에 필요한 식량 등 물자를 확보하고, 몽고 군대의 해상 작전을 봉쇄하고자 하였다. 삼별초가 제주에서 항쟁을 전개하는 시기에도 일본 오키나와 지역과의 연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몽고의 관심이 집중되던 제주에서 삼별초가 항쟁을 전개하자 몽고는 고려 정부에 삼별초 토벌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고려 정부는 1272년(원종 13) 3월에 김통정을 회유하기 위한 1차 사신을 파견하였고, 그 해 8월에는 개성에 거주하는 김통정의 친인척을 2차 회유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김통정의 거부로 무산되자, 몽고는 1272년 12월 여몽연합군에 의한 삼별초 토벌을 결정하였다. 삼별초 토벌은 남송과 일본 정벌을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문제였다. 해상 요충인 제주의 확보는 몽고로서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1만 명으로 편성된 여몽연합군은 1273년(원종 14) 3월 160여 척의 선박에 나누어 타고 출정하였다. 김방경을 필두로 3군으로 나누어 함덕포, 귀일포, 명월포를 통해 각각 제주 상륙에 성공하였다. 김방경은 4월 28일에 삼별초의 최후 거점인 항파두리성을 접수하고 삼별초의 항복을 공식화하였다.

김통정 장군은 부분적인 항전을 계속하다가 6월에 7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라산 기슭, 붉은오름으로 들어가 자결함으로써 최후를 맞았다. 이로써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종식되었다. 삼별초의 많은 무리들은 배를 타고 일본 구주 혹은 오키나와 지역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특히, 현재 오키나와 지역에서 대량으로 출토되는 고려 기와 중에 계유(癸酉)라 명문된 기와가 있다. 이 기와의 계유년은 1273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삼별초 군대가 남하하여 오키나와 지역에서 만든 고려 기와라는 것이다.

[제주인들이 삼별초에 등을 돌린 이유]

지난 해 9월 제주를 방문한 북한 김용순 비서는 항파두리성을 답사하고 ‘몽골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삼별초군의 애국투쟁정신은 후세에 길이 전해지리라’라는 방명록을 남겼다. 삼별초는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인 고려를 건설하기 위해 몽고에 반대하는 반외세, 몽고와 강화했던 고려 정부에 대한 반정부 노선을 분명히 하고 항쟁을 전개하였다. 삼별초의 이문경 부대가 제주에 들어와서 관군과 전투를 벌일 때까지만 해도 제주도민들은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김통정 장군 등이 제주에 들어와 본격적인 항쟁을 전개하면서 삼별초와 제주도민 사이에는 서서히 틈이 벌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 군대는 대몽 항쟁을 위한 여러 방어 시설의 구축, 선박의 건조, 군량 확보 차원에서 제주도민들에게 무리한 약탈을 일삼았다.

삼별초 토벌군의 공격을 받고 삼별초 군대가 힘없이 무너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제주도민들이 삼별초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제주도민들에게 긍정적 요소보다는 부정적 요소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이는 몽고로 대변되는 외세에 대한 인식이 제주도민들에게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강력하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별초에 대한 이중성은 현재 제주도에 전해지는 김통정 장군과 관련된 설화에서도 상반되어 나타난다.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김통정은 지렁이를 부친으로 하여 과부에서 날개 달린 장수로 탄생하여 도술 등을 부리는 뛰어난 성장 과정을 거쳤다. 결국 그는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해상 왕국을 건설하였으나 아기업개의 배신으로 김통정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설화의 전반부가 김통정을 영웅시하는 것이라면, 후반부의 내용은 제주도민들로부터 버림받고 비참한 생을 마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항파두리성을 쌓을 때 제주도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인분을 먹으면서 성을 쌓았다’든가, 김통정이 ‘제주도민들을 고생시켰으니 물이라도 먹고 살아라’하고 홰를 밟아서 ‘횃자국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제주도민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보면, 김통정에 대한 상반된 도민들의 평가가 있음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남제주군 안덕면 덕수리 광정당 본풀이에서는 김통정이 당신(堂神)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고 전해지며, 애월읍 고내리에 있는 당(堂)은 김통정을 직접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이처럼 삼별초가 제주도민들에게 상반되어 전해지는 것은 반외세, 반개경 정부에 대한 김통정의 항쟁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반면,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는 삼별초의 항쟁이 제주인의 삶을 매우 어렵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항파두리성의 성역화는 반외세 항쟁 못지않게 제주도민의 입장이 일정하게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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