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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603
한자 金正喜
영어음역 Kim Jeonghui
이칭/별칭 원춘,완당,추사,예당,시암,과파,노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동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서화가
출신지 충청남도 예산군
성별
생년 1786년연표보기
몰년 1856년연표보기
본관 경주
대표경력 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개설]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이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다.

[활동사항]

김정희는 일찍이 24세 때 중국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이름난 유학자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하였고, 경학(經學)·금석학·서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참의·시강원보덕 등을 지냈다. 1830년(순조 30) 아버지 김노경윤상도(尹商度) 옥사의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면서, 김정희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840년(헌종 6) 윤상도의 옥사가 재론되면서 다시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 1848년까지 약 9년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김정희의 적거지는 처음에는 대정현 교리(校吏) 송계순의 집이었으나, 나중에 지금 추사 적거지가 마련되어 있는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다. 나아가 식수 관계로 한때 창천리에 옮겨 살기도 하였다.

그가 유배되어 있던 1845년(헌종 11)에는 영국의 사마랑호가 제주도 연근해를 측량하는 등 이국선이 자주 왕래하기도 하였다. 유배되어 있는 동안 강기석·강도순·강사공·김구오·김여추·김좌겸·박계첨·이시형·이한우·홍석우 등이 그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김정희의 제주 유배는 그에게 있어 추사체를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시도(詩道)에서도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하였고,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두보(杜甫)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었다.

김정희는 고증학의 경향에 따라 시·서·화 일치의 동일묘경(同一妙境)을 항상 주장했는데, 화풍(畵風) 역시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따랐다. 특히 난법(蘭法)은 예(隷)에 가깝다고 보고,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밖에 대나무와 산수(山水)를 표현하는 데 고담하고 아름다운 필선(筆線)을 사용하여 고상한 기품을 드러냈다. 현존하는 작품 중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와 『모질도』·『부작란(不作蘭)』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 전각(篆刻)의 분야에서도 추사각풍(秋史刻風)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수립하여 자신의 작품에 낙관(落款)으로 사용했다. 그밖에도 문학에서는 39통에 이르는 친필 언간(諺簡)이 실학적인 어문의식(語文意識)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

문집으로 『완당집(阮堂集)』, 『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재시고(覃硏齋詩藁)』가 있고, 1934년에 간행된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이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강** 굿 베리 굿 진짜 필요했는데 감사해요 요즘 세상 좋아졨네 ㅎㅎ 2018.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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