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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500
한자 代表的記錄畵耽羅巡歷圖
영어의미역 Mastepiece of Jeju, Tamnasullyeokdo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동전

[개설]

『탐라순력도』이형상 제주목사가 재임할 당시 제주도를 동-남-서-북으로 한 달 간 걸쳐 순력(巡歷)하고 돌아와서 그간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28폭의 그림에 담아낸 총 41면으로 된 도첩(圖帖)으로, 채색화이자 기록화이다.

기록화는 특정한 사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그 내용을 시각적으로 전달한 그림을 말한다. 중앙에서는 도화서 화원(畵員)들이 의궤도를 비롯한 기록화를 담당하였다.『탐라순력도』는 지방에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화공의 이름이 남아 있고 그 화필의 수준이 중앙 화원들이 그린 의궤도를 능가하고 있어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주목사의 순력]

순력(巡歷)은 본래 관찰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제주의 경우 전라도관찰사가 매년 2차례 제주에 내려와 삼읍을 순력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전라도관찰사는 자신의 임무 중 일부를 제주목사에게 위임하였는데, 순력의 임무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제주목사는 전라도관찰사를 대행하여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제주 삼읍인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을 순력하여야 했다. 이 예에 따라 제주목사 이형상은 1702년(숙종 28) 가을 순력을 음력 10월 29일 출발하여 11월 19일까지 21일 동안 실시하였다. 이형상은 제주도 관내를 순회하면서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을 화공 김남길(金南吉)로 하여금 40폭의 채색화로 그리게 하였던 것이다.

[구성과 형태]

『탐라순력도』는 순력의 내용을 담은 각 행사 장면 28도(圖), 평상시의 행사 모습을 담은 11도, 제주도와 주변 도서의 지도인 「한라장촉(漢拏壯囑)」 1도, 「호연금서(浩然琴書)」1도 등 총 41도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서문 2면을 넣고 화첩(畵帖)은 오노필(吳老筆)에게 청하여 비단으로 장식하여 만들어 ‘『탐라순력도』’라 명명하였다.

이형상 자신은 매 그림의 상단에 네 자로 제목을 달고 하단에 설명을 첨가하였다. 『탐라순력도』의 완성 시기는 서문의 말미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1703년 5월 13일로 생각된다. 이형상 제주목사는 사실 1703년 3월에 파직당하였으나, 그 해 5월 초까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탐라순력도』는 가로 35㎝ × 세로 55㎝ 크기의 장지(壯紙) 위에 가로 29.5㎝ × 30.5㎝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가로 29.5㎝ × 세로 3.7㎝의 난을 만들어 네 글자로 제목을 달았다. 그림의 하단에는 가로 29.5㎝ × 세로 12.8㎝ 크기의 난을 좌우로 이등분하여 우측 칸에 그림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형상의 종손으로 경상북도 영천시에 거주하는 이수창(李秀昌)이 소장해 오다가 1998년 12월에 제주시청에서 3억 원에 매입, 소장하고 있다. 현재 보물 제65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형상『남환박물』과 함께 조선 제주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라장촉(漢拏壯囑)]

1702년(숙종 28) 4월 15일 제작되었다. 당시 제주도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과 주변 도서에 대한 지식을 알려 주는 그림이다. 먼저 제주도와 관련해서 삼읍의 경계가 시대에 따라 다소의 변동은 있었으나, 이 그림 상으로는 제주목과 대정현이 판포(板浦), 제주목과 정의현은 용항포(龍項浦), 대정현과 정의현의 경우는 법한포(法閑浦)와 색수(塞水)의 중간 지점이 경계가 되고 있다.

삼읍 관아(三邑 官衙)[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위치와 9개 진(鎭)의 위치 즉, 화북진·조천진·별방진·수산진·서귀진·모슬진·차귀진·명월진·애월진의 소재지를 적색으로 표시하여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그 외에 목장·산악·도로·마을명·하천뿐만 아니라, 80여 개의 포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포구의 분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그림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제주도가 섬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에 따른 주변 도서와의 관련 내용이다. 즉, 제주도를 중심으로 주변 도서를 24방위로 표시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이 한 장의 그림으로 가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육지 지역과의 유일한 교통 수단이 선박임을 감안할 때, 이는 선박의 조난 혹은 이국선(異國船)의 표도시(漂到時)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하단부에 기록해 놓은 내용을 보면, 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과 군관호군 이우해(李迂楷) 등 11원, 그리고 심약(審藥: 약재를 심사 감독하는 관원) 윤기은(尹起殷)을 부기하였다. 제주도는 전체 둘레 480리, 대로(大路)의 둘레 378리, 동서 길이 170리, 남북 길이 73리로 나타나 있다.

육지 지역과의 주요 관문 중의 하나인 해남까지 970리, 동쪽 일본국까지 2,000여리, 병(丙: 11시)의 방향 여인국(女人國)까지 8,000여 리, 오(午: 12시)의 방향 유구국(琉球國)까지 5,000여 리, 정(丁: 13시)의 방향 안남국(安南國)까지 17,000여리, 미(未: 14시)의 방향 섬라국(暹羅國) 점성(占城)까지 10,000여 리, 곤(坤: 15시)의 방향 영파부(寧波府)까지 8,000리, 신(申: 16시)의 방향 소항주(蘇抗州)까지 7,000리, 경(庚: 17시)의 방향 양주(楊州)까지 7,000리, 신(辛: 19시)의 방향 산동성(山東省)까지 10,000리, 술(戌: 20시)의 방향 청주(靑州)까지 10,000여 리로 기재해 거리의 원근을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승보시사(陞補試士)]

1702년(숙종 28) 윤6월 17일에 실시하였다. 이형상 제주목사가 시관(試官), 제주판관 이태현이 부시관(副試官), 대정현감 최동제(崔東濟)를 참시관(參試官)으로 하여 치루어진 승보시(陞補試)의 광경이 그려져 있다. 승보시는 본래 성균관 유생들에게 치루어진 소과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시험인데, 외방(外方)에서는 개성·제주·수원에서 시행되었다.

제주의 경우는 1639년(인조 17)부터 실시하였는데, 고시관 3원(員: 9품 이상의 관료에게 붙이는 칭호)이 매년 2명을 뽑아서 소과 복시(覆試)의 응시 자격을 주었다. 후일 고시관·시취생의 수는 여러 차례 변화한다. 1702년에는 윤6월 17일부터 연 3일간 시취(試取)하여 응시인 12명 중에서 최종적으로 시(詩)·부(賦) 각 1인씩 2명을 시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마봉진(貢馬封進)]

1702년(숙종 28) 6월 7일에 실시하였다. 진상에 필요한 말을 각 목장에서 징발하여 제주목사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공마봉진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정현감 최동제를 차사원(差使員)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진상에 필요한 말은 433필이고 흑우(黑牛) 20수였다. 공마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어승마(御乘馬: 임금이 탈 말) 20필, 연례마(年例馬: 매년 정기적으로 공납하는 말) 8필, 차비마(差備馬: 특별한 용도로 쓰기 위하여 마련하는 말) 80필, 탄일마(誕日馬: 임금의 생일을 축하하여 바치는 말) 20필, 동지마(冬至馬: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함께 바치는 말) 20필, 정조마(正朝馬: 정월 초하룻날을 맞이하여 바치는 말) 20필, 세공마(歲貢馬: 연말에 각 목장에서 바치는 말) 200필, 흉구마(凶咎馬: 흉변이 있을 때에 사역하는 말) 32필, 노태마(駑태馬: 짐 싣는 말) 33필 등이다.

[감귤봉진(柑橘封進)]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봉진하는 그림이다. 귤의 진상은 9월부터 시작하여 매 10일 간격으로 1운(運)에서 20운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그림이 천신용(薦新用: 제사 등에 쓰이는 햇과일) 2차 진상 21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위 원칙이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귤의 진상을 위해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李壽童) 제주목사는 별방·수산·서귀·동해·명월의 각 방호소에 과원(果園)을 설치하고, 그 곳을 수비하는 군인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후 과원은 제주목에 22개소, 정의현에 7개소, 대정현에 6개소로 증설되었으며 숙종 때에는 모두 42개소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과원에서 생산되는 양으로는 진상액을 충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되자 관아에서는 일반 민가에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하여 관리하였다.

일반인들에게는 귤나무 8주(株)를 기준으로 하여 1년의 역(役)을 면제하여 주는 방안이 마련되기도 했지만, 귤이 열매를 맺으면 관아에서 일일이 그 열매를 헤아려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그 수를 귤나무 소유자에게 모두 부과했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수확 시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남아 있어 그간에 해충 또는 바람 등에 의해 떨어진 귤마저 소유자에게 책임이 전가되었던 것이다. 이에 민가에서는 귤나무가 ‘고통을 주는 나무’라 하여 도리어 귤나무에 더운 물을 끼얹어 고사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망경루(望京樓) 앞뜰에서 귤을 상자에 넣어 봉(封)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당시 봉진한 수량은 다음과 같다. 당금귤(唐金橘) 678개, 감자(柑子) 25,842개, 금귤(金橘) 900개, 유감(乳柑) 2,644개, 동정귤(洞庭橘) 2,804개, 산귤(山橘) 828개, 청귤(靑橘) 876개, 유자(柚子) 1,460개, 당유자(唐柚子) 4,010개, 치자(梔子) 112근, 진피(陳皮) 48근, 청피(靑皮) 30근 등이다.

제주의 귤이 조정에 도착하면 임금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일부를 나누어 주면서 과거 시험을 시행하였는데, 이른바 황감제(黃監製)라는 과거 시험이다.

[귤림풍악(橘林風樂)]

망경루 후원(後園) 귤림에서의 풍악도(風樂圖)이다. 당시 제주읍성 안에는 동과원·서과원·남과원·북과원·중과원의 5개소와 별과원(別果園) 등 6개소의 과원이 있었는데, 이 과원은 북과원(北果園)으로 생각된다. 여기는 본래 여말선초에 상진무청(上鎭撫廳)·부진무청(副鎭撫廳)이 있었던 곳이다. 과원에서 풍악을 즐기는 모습이 상세히 보이며, 과원 둘레에 대나무가 방풍림으로 심어져 있다.

1702년 제주 삼읍 귤의 총결실수(摠結實數)를 부기하였다. 당금귤 1,050개, 유자 48,947개, 금귤 10,831개, 유감 4,785개, 동정귤 3,364개, 산귤 188,455개, 청귤 70,438개, 유자 22,041개, 당유자 9,533개, 등자귤(橙子橘) 4,369개, 우금귤(右金橘) 1,021개, 치자 17,900개, 지각(枳殼) 16,034개, 지실(枳實) 2,225개 등이다.

[교래대렵(橋來大獵)]

1702년(숙종 28) 10월 11일 시행하였다. 교래에서 진상을 위한 산짐승과 날짐승을 사냥하는 그림이다. 제주 지역의 경우 산짐승은 주로 노루·사슴·돼지·지달·오소리 등이 서식했고, 날짐승은 꿩·까마귀·솔개·참새 등은 있었으나 황새·까치 등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일 사냥에 참여한 관원은 삼읍의 수령과 감목관(監牧官)이며, 사냥에 동원된 인원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마군(馬軍) 200명, 걸어서 짐승을 일정한 장소로 모는 보졸(步卒) 400여 명, 포수 120명이다. 사냥을 통해 얻은 물건은 사슴 177마리, 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궝 22수이다.

그림에 의하면 리명(里名)으로 여운영아리(如雲永我里)·구두리(九斗里)의 명칭이 보이며, 산악명으로 대녹산(大鹿山)·판매동산(板埋同山)·흑악(黑岳)·봉라비악(峯羅非岳) 등의 명칭이 보이고 있어 그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산장구마(山場驅馬)]

1702년(숙종 28) 10월 15일에 시행하였다. 산장(山場)에서 말을 몰아 일정한 장소에 모으고 마필 수를 확인하는 그림이다. 제주판관·감목관·정의현감이 참여한 가운데 결책군(結柵軍: 사장과 원장의 목책을 만드는 군인) 2,602명, 구마군(驅馬軍: 말을 모는 임무를 맡은 군인) 3,720명, 목자(牧子: 말의 직접적인 관리자)와 보인(保人: 목자의 경제적 기반의 일부를 제공하는 사람) 214명 등이 동원되고 있다.

성판악 남쪽에서 벌어진 구마(驅馬)는 남북 약 40리, 동서 약 60~70리의 넓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목책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녹산장(鹿山場)·상장(上場)·침장(針場)으로 생각된다.

각 구역마다 말을 취합하는 데 필요한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이 설치되어 있다. 원장은 우마를 취합하기 위하여 만든 원형 목책이고, 사장은 취합한 우마를 1두 또는 1필씩 통과할 수 있게 만든 좁은 목책 통과로이다.

원장은 다시 미원장(尾圓場)과 두원장(頭圓場)으로 구분되며, 그 중간을 연결하는 것으로 사장이 있다. 우마를 먼저 미원장에 몰아 놓고 사장을 통해서 점검한 후에 두원장에 취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장은 우마의 수효를 파악하는 데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상 혹은 다른 목장으로 우마를 보내기 위하여 하나씩 붙들 수 있도록 된 장치이기도하다.

[성산관일(城山觀日)]

1702년(숙종 28) 7월 13일에 탐승(探勝)하였다. 성산 일출봉에서 해뜨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으로 일출봉과 우도의 지형이 자세하다. 제주판관, 정의현감, 군관 김진기(金振淇), 도한필(都漢弼)이 배행했다.

일출봉 입구에 진해망(鎭海望)의 옛 터가 표시되어 있고, 그 위로 일출봉의 정상에 있는 성산망(城山望)까지 오르는 등정 길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각교(刻橋)라 하여 등정 길이 험난하기 때문에 암반에다 모두 계단을 새겨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일출봉 앞 평지에는 봉천수(奉天水)가 있으며, 이곳에서 하마(下馬)하고 걸어서 성산망에 이르게 되어 있다. 또한 오조연대(五照煙臺)의 위치, 우도와 죽도의 지형, 그리고 우도 내에 있는 어용굴(魚龍窟)이 표시되어 있다.

[우도점마(牛島點馬)]

1702년(숙종 28) 7월 13일에 실시하였다. 우도 목장 내에 있는 말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마필은 262필이며, 이들 말을 관리하는 목자와 보인은 23명이다. 우도의 모습이 동두(東頭)라 표기된 곳을 머리로 하여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포구와 어용굴(魚龍窟)이 표시되어 있다. 어용굴은 신용(神龍)이 사는 곳으로 어선이 접근하면 대풍(大風)·뇌우(雷雨)가 일어나 나무를 쓰러뜨리고 곡식을 해친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당시 우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가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이원조 제주목사가 장계를 올려 우도 목장의 개간을 허락받은 1843년경부터이다.

[화북성조(禾北城操)]

1702년(숙종 28) 10월 29일에 실시하다. 화북진에 소속된 성정군(城丁軍)의 군사 훈련 모습을 그렸다. 당시 화북진의 조방장은 이희지(李喜枝)이며, 성정군의 규모는 172명이다. 군대의 점검과 아울러 군기의 수효도 일일이 확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북성이 위치하고 있는 진의 자세한 지형과 성의 위치, 그리고 성내의 건물 배치 뿐만 아니라 민가의 위치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성의 좌측에는 화북진에 소속된 별도연대(別刀煙臺)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별도포 안에는 몇 척의 배가 정박되어 있는데, 당시 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조천조점(朝天操點)]

1702년(숙종 28) 10월 29일에 실시하다. 조천진 성정군의 군사 훈련과 인근 제2소 목장의 둔마(屯馬)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조천진의 위치와 연북정을 비롯한 진내(鎭內)의 건물 배치 상황, 민가의 위치, 해안에 흩어져 있는 여(礖)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조천진은 서산봉수(西山烽燧)조천연대·왜포연대·함덕연대를 관할하였다. 조천진의 조방장은 김삼중(金三重)이며, 휘하의 성정군은 423명이다. 군기도 아울러 점검하였다. 또한 제2소 목장의 둔마 505필과 목자 87명을 점검하였다.

[김령관굴(金寧觀窟)]

1702년(숙종 28) 10월 30일에 탐승(探勝)하다. 이곳에서 말을 갈아타기 위해 잠시 머문 것으로 생각되며 김녕의 용암굴에 횃불을 들고 들어가는 그림이다. 굴의 높이 30척, 넓이 20척, 길이 5리에 해당하는 굴이다. 오늘날의 사굴과 만장굴을 합하여 김녕굴(金寧窟)이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입산(笠山)에 입산봉수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별방조점(別防操點)]

1702년(숙종 28) 10월 30일 순력(巡歷)하다. 별방성에서의 군사 훈련과 성정군·군기·우마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별방진(別防鎭)·황자장(黃字場)·지미봉수(指尾烽燧)·하도의리리(下道衣離里)의 민가, 연대의 위치가 상세하다.

별방진은 만조시에 바닷물이 흘러들어 오도록 되어 있으며, 동창(東倉)과 객사 건물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순력 중에 10월 30일은 이곳에서 머물렀다. 별방진의 조방장은 김여강(金汝江)이고, 성정군은 423명으로 화북성의 성정군 수효와 일치한다.

황자장의 우마수는 흑우 247수, 말 946필이며, 목자와 보인은 모두 187명이다. 별방진 내에 위치해 있던 동창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은 2,860여 석으로 부기되어 있다. 한편, 별방진 관할의 봉수와 연대는 입산봉수(笠山烽燧)·왕가봉수(往可烽燧), 입두연대(笠頭烟臺)·좌가연대(佐可烟臺)·무주연대(無住烟臺) 등이다.

[별방시사(別防試射)]

1702년(숙종 28) 11월 초1일 별방성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별방조점(別防操點)」의 그림과 비슷한 형태이지만, 별천자둔마(別天字屯馬)를 점검하기 위한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을 별방진성 안에 마련해 놓았다.

두포연대(頭浦烟臺)와 지미봉수(指尾烽燧)의 위치와 우도의 일부가 나타나 있다. 활 쏘는 일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208인이며, 교사장(敎射長)은 10명이다. 당시 활 쏘는 방식에는 몇 보의 거리에 서서 또는 말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형태와 유엽전(柳葉箭: 살촉이 버들잎처럼 생긴 화살)을 가지고 쏘는 형태 등이 있었다.

[수산성조(首山城操)]

1702년(숙종 28) 11월 초2일 정의현 수산진성에서의 성정군 군사 훈련를 그린 그림이다. 수산진성·수산봉수·협재연대(俠才烟臺)·구수산고성(舊首山古城)의 위치가 상세하다. 수산진성 내에는 건물 배치 상황뿐만 아니라 샘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가 참석하였으며, 조방장 유효갑(兪孝甲)을 비롯해 성정군 80명 및 군기에 대한 점검을 실시하였다. 수산진 소속 봉수는 지미봉수(指尾烽燧)·성산봉수(城山烽燧)·수산봉수(首山烽燧)가 있고, 연대는 협자연대(俠子烟臺)·오소포연대(吾召浦烟臺)·종달연대(終達烟臺)가 있다.

[정의조점(旌義操點)]

1702년(숙종 28) 11월 초2일 순력(巡歷)하다. 정의현성에서의 군사 훈련과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정의현성·달산봉수(達山烽燧)의 위치와 읍외촌(邑外村)·궁산촌(弓山村)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정의현성의 3문(동문·서문·남문), 객관·관아·창고·문묘(文廟) 등의 건물 명이 보인다.

당시 정의현은 읍내 1리, 동면(東面) 10리, 서면(西面) 12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민호(民戶)는 1,436호이며, 전답(田畓)은 140결이다. 성장(城將) 2인, 치총(雉摠) 4인, 성정군(城丁軍) 664명과 제반 군기는 물론 목자·보인 모두 190명, 마필 1,178필, 흑우 229수, 창고의 곡식 4,250여 석을 점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의양노(旌義養老)]

1702년(숙종 28) 11월 초3일 실시하였다. 정의현성에서 치루어진 노인 잔치를 그린 그림이다. 정의현성 내의 건물 배치 상황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노인 잔치는 객관(客館) 앞에서 이루어졌는데, 춤추는 모습 등이 보인다. 당시 정의현에 거주하는 노인은 80세 이상이 17인, 90세 이상이 5인이다.

제주 지방의 풍속 중의 하나가 인다수고(人多壽考: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인데, 이원진(李元鎭)『탐라지(耽羅志)』에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 가운데 한라산이 있어 남쪽 큰 바다의 독기는 산에 막히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기운이 더운 습기와 열기를 몰아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주 내에서도 한라산 남쪽에 비하여 북쪽이 더욱 장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속설(俗說)에는 봄·가을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노인성(老人星)을 보면 장수한다고 전해지는데, 이 노인성이 제주의 한라산에서 흔히 볼 수 있어 도민들 중에 장수하는 자가 많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정의강사(旌義講射)]

1702년(숙종 28) 11월 초4일에 실시하였다. 11월 초4일은 동지일이기도 했는데, 정의현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시취(試取)하는 그림이다. 도훈장(都訓長)인 유학(幼學) 고세웅(高世雄), 각면(各面) 훈장(訓長) 5명, 각면 교사장(敎射長) 7명,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사람 166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87명의 사원(射員: 활 쏘는 사람)이 재주를 겨루웠다. 당시 정의현에 거주하는 사원은 350여 명이었다.

정의현성이 직접적으로 관할하는 봉수와 연대가 나타나 있다. 봉수는 남산봉수(南山烽燧)·독자봉수(獨子烽燧)·달산봉수(達山烽燧)·토산봉수(兎山烽燧) 등 이고, 연대는 말등포연대(末等浦烟臺)·천미연대(川尾烟臺)·소마로연대(所馬路烟臺)·벌포연대(伐浦烟臺) 등이다.

[정방탐승(正方探勝)]

1702년(숙종 28) 11월 초5일에 탐승(探勝)하다. 배를 타고 정방폭포를 탐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폭포 위에 있는 소나무를 강조해서 그린 인상이 짙으며, 그 아래 정방연(正方淵)에서 배를 타고 놀이를 즐기고 있다. 부기(附記)의 내용으로 보아 정방폭포는 길이 80여 척, 넓이 5척임을 알 수 있다.

이형상『남환박물』에 의하면, 정방연(正方淵)은 정의현에서 서쪽 68리에 있으며 폭포의 위에는 큰 소나무들이 있고 밑으로 바다가 있어 폭포가 바다에 직접 떨어져 가히 제일명구(第一名區)라 하였다.

[천연사후(天淵射帿)]

1702년(숙종 28) 11월 초6일에 실시하였다. 천지연폭포에서의 활을 쏘는 광경을 그린 그림으로 폭포의 반대편에 과녁을 설치하여 화살을 쏘고 있는 모습이다.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 메고 그 줄을 이용해 좌우로 이동하고 있는 추인(芻人: 짚이나 풀로 만든 인형)의 모습이 이채롭다.

이와 같은 추인은 주로 기병들의 화살을 쏘는 표적으로 이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과녁을 향해 쏜 화살을 상대편에서 추인에게 꽂으면, 이쪽에서 줄을 당겨 추인에게 꽂힌 화살을 건네받는 것이다. 천지연폭포의 길이 50여 척, 넓이 10여 척이라 부기(附記)되어 있어 정방폭포에 비해 폭포의 길이는 짧으나 넓이는 그 배에 해당한다. 폭포의 좌우는 깎인 봉우리가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 마치 활에 화살을 당긴 형상을 하고 있다.

[서귀조점(西歸操點)]

1702년(숙종 28) 11월 초5일에 순력(巡歷)하다. 서귀진의 군사 조련과 군기 및 말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서귀진의 위치와 주변 섬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서귀진 내의 건물로 병고(兵庫)와 창고, 그 외 객사(客舍) 등이 보인다.

정의현감과 더불어 대정현감이 함께 참석하였는데, 다음 순력 지역이 대정현 지역이기 때문에 제주목사를 배행하기 위해 참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서귀진 조방장은 원덕전(元德全)이었으며, 성정군 68명과 군기를 점검하고, 목자와 보인 39명과 말 237필도 아울러 점검하였다. 서귀진 소속의 봉수는 자배봉수(資盃烽燧)·호촌봉수(狐村烽燧)·삼매양봉수(三每陽烽燧)이고, 연대는 금로포연대(金路浦烟臺)·우미연대(又尾烟臺)·보목연대(甫木烟臺)·연동연대(淵洞烟臺)이다.

[현폭사후(懸瀑射帿)]

1702년(숙종 28) 11월 초6일에 실시하였다. 현재의 중문 천제연폭포에서 활 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대정지경(大靜之竟)’임을 표시하는 글자가 보이며, 천제연폭포를 상폭(上瀑)과 하폭(下瀑)으로 구분해 놓고 있다.

천지연폭포에서와 마찬가지로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매고 그 줄을 이용해 추인(芻人: 짚이나 풀로 만든 인형)이 좌우로 이동하고 있다. 이와 같은 추인은 주로 기병들의 화살을 쏘는 표적으로 이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과녁을 향해 쏜 화살을 상대편에서 추인에게 꽂으면 이쪽에서 추인이 메달린 줄을 당겨 추인에게 꽂힌 화살을 건네받는 것이다.

폭포의 길이 50여 척, 넓이 5척이라 부기(附記)하였다. 상폭 서쪽 암벽에는 임관주(任寬周)의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진다. ‘천제연 열린 곳에 큰 폭포 흘러내려/ 총석(叢石)으로 옮겨오고 깊은 못에 쏟아지네/ 추인(芻人)은 화살을 지고 공중을 걸어가니/ 제일 기이하고 볼만한 것이 이 사후(射候)가 아닌가’라는 시이다.

[고원방고(羔園訪古)]

1702년(숙종 28) 11월 초6일에 탐승(探勝)하다. 고둔과원(羔屯果園)에서 왕자구지(王子舊地)를 탐방하는 그림이다. 고둔과원은 대정현성에서 동쪽으로 55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 용흥동 속칭 염돈마을 운랑천 부근의 염돈과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원진『탐라지』에 의하면, 이곳은 고득종의 별장 터로도 유명하다. 이 과원의 좌측에 ‘왕자구지(王子舊地)’라 되어 있고, 그 곳에서 기녀들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가운데 풍악을 즐기고 있다. 과원의 방풍림으로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과원의 밖에는 참나무 밭과 매화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운랑천으로 추정되는 물과 그 물을 이용하여 부근에 논이 형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산방배작(山房盃酌)]

1702년(숙종 28) 11월 초10일에 실시하였다. 산방굴(山房窟)에서의 배작(盃酌)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송악산(松岳山), 형제도(兄弟島), 군산(軍山), 감산(紺山), 용두(龍頭) 등이 보이며, 도로와 산방연대(山房烟臺)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사계리 포구가 흑로포(黑路浦)로 표기되어 있다.

이형상『남환박물』에 의하면, “산방산은 대정현 동쪽 10리에 위치해 있으며, 산의 높이 200장(丈), 산의 둘레는 10리로 산 전체가 돌로 형성되어 있다. 남쪽 언덕에 큰 굴이 있는데 굴암이라 이르며, 물이 굴 위로부터 한 방울씩 떨어진다. 그 남쪽에 암문(暗門)이란 굴이 있는데, 그 벽 사이가 1척이며, 깊이가 100척, 길이 50여 척에 이른다. 그 북쪽에 큰 굴이 있는데,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으나 피생문(彼生門)이라 한다.’라 하여 세 개의 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정조점(大靜操點)]

1702년(숙종 28) 11월 초10일에 대정현성의 성정군(城丁軍)의 군사 훈련과 대정현의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대정현성의 내부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객사(客舍), 군기고(軍器庫), 향청(鄕廳), 작청(作廳), 관아(官衙), 관청(官廳) 등의 건물 위치와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대정현의 편제는 읍내 1리, 동면(東面) 9리, 서면(西面) 2리로 모두 12리였고, 민호는 797호이며 전답은 149결이었다. 성장(城將) 2인, 치총(雉摠) 4인, 성정군(城丁軍) 224인, 군기(軍器), 문묘(文廟)의 제기(祭器)·제복(祭服)·서책(書冊), 목자와 보인 123명, 말 849필, 흑우 228수, 창고의 곡식 1,950여 석을 일일이 점검하였음을 알 수 있다.

26) 대정배전(大靜拜箋)

1702년(숙종 28) 11월 11일 대정현에서 시행된 배전(拜箋)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순력 도중에 대정현에서 조정의 경사를 듣고 배전을 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배전(拜箋)이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지방관이 그 소재지에서 임금에게 전(箋: 書面)을 올려 하례(賀禮)의 뜻을 표하는 의식을 말한다.

기사의 내용은 없다. 「대정조점(大靜操點)」, 「대정양노(大靜養老)」, 「대정강사(大靜講射)」의 그림과 아울러 대정현성 내의 건물 복원에 상당히 유용한 그림이다. 읍내의 민가와 읍성 밖에 동성리로 추정되는 민가들이 보인다.

[대정양노(大靜養老)]

1702년(숙종 28) 11월 11일 대정현에서의 노인 잔치 광경을 그렸다. 당시 대정현에는 80세 이상의 노인 11인, 90세 이상의 노인 1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제주목사의 순력 시에 이와 같은 노인 잔치는 거의 관례화되어 있었다.

[대정강사(大靜講射)]

1702년(숙종 28) 11월 12일 대정현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시취(試取)하는 광경을 그렸다. 대정현성 내의 건물 위치와 아울러 주변의 송악산, 형제도, 산방산, 파군산, 모슬포, 가파도, 마라도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파군산 뒷편에 향교의 모습이 보인다. 저별망이 저성망(貯星望), 가파도가 개파도(蓋波島), 마라도(馬羅島)가 마라도(摩羅島)로 표기되어 있다.

부기의 내용을 보면, 도훈장(都訓長)에 현감을 역임한 문영후(文榮後), 각면(各面) 훈장 5인, 각면 교사장(敎射長) 5인, 강유(講儒: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42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21명의 사원(射員: 활 쏘는 사람)이 활을 쏜 것으로 추정된다.

[모슬점부(摹瑟點簿)]

1702년(숙종 28) 11월 13일 모슬진 군대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이형상 제주목사가 직접 점검하지 않고 군관 전만호(前萬戶)와 유성서(柳星瑞)를 대신 보내어 점검하도록 하였다.

대정현성에서 모슬진에 이르는 주변 지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무수연대(茂首烟臺)[동으로 산방연대, 서로 서림연대에 응함]와 모슬봉수(摹瑟烽燧)[남으로 저별봉수, 서로 당산봉수에 응함]의 위치와 모슬촌의 민가가 표기되어 있다.

점검 결과 모슬진의 조방장에 오세인(吳世仁), 방군(防軍)·기병·보병이 24명이었다. 제주목사가 직접 점검하지 않고 장부상으로만 확인한 경우는, 이를 구별하여 점부(點簿)라 한 것으로 생각된다.

[차귀점부(遮歸點簿)]

1702년(숙종 28) 11월 13일에 실시하였다. 차귀진의 군사 훈련과 점검을 그렸다. 이형상 제주목사가 친히 점검하지 않고 당시 군관으로 있는 사과(司果) 홍우성(洪遇聖)을 대신 보내어 점검하도록 하고, 이형상 제주목사는 문서상으로 점검하고 있다.

점검 결과의 내용은 차귀진 조방장 김국준(金國俊), 방군(防軍)·기병·보병이 20명이며 그 외 군기를 점검하였다. 이 그림에는 차귀진의 모습뿐만 아니라, 차귀진 소속의 당산봉수(堂山烽燧). 우두연대(牛頭烟臺)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모동(毛同)의 삼나무 밭과 우자장(宇字場) 목장이 보인다.

[명월조점(明月操點)]

1702년(숙종 28) 11월 13일에 순력 및 숙소. 명월진(明月鎭) 성정군의 훈련 모습과 말을 점검하는 과정을 그렸다. 명월진성 내의 천(泉)·별고(別庫)·서별창(西別倉)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고, 주변의 지형을 상세히 표기하였다. 즉, 우둔촌(牛屯村)과 수류천촌(水流川村) 민가의 위치, 만조봉수(晩早烽燧)·마두연대(馬頭烟臺)·배령굴(排令窟)·월계과원(月溪果園)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또한 명월진의 해안변에 위치한 논 등도 상세히 그려져 있다. 명월진 내에 말을 점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을 설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부기(附記)의 내용은, 지방관겸중군(地方官兼中軍) 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 명월진 조방장 강세건(姜世建), 성정군(城丁軍) 412명, 목자·보인 185명, 말 1,064필, 창곡의 곡식 3,300여 석이다.

[명월시사(明月試射)]

1702년(숙종 28) 11월 14일에 실시하였다. 명월진성에서의 활 잘 쏘는 사람을 시취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명월조점(明月操點)」 그림과 흡사하며, 우면(右面) 교사장(敎射長) 17인, 활 쏘는 사원(射員) 141명이 참여하고 있다. 주위에 대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명월진성은 본래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1510년(중종 5)에 장림(張林) 제주목사가 축조하였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이경억(李慶億) 제주목사가 개축하였는데, 둘레가 3,050척, 높이가 9척, 3문(동문·서문·남문)이 있으며 문 위에는 누(樓)를 설치하였다.

[애월조점(涯月操點)]

1702년(숙종 28) 11월 14일 순력(巡歷) 및 숙소. 애월진(涯月鎭)의 군사와 말을 점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애월진·애월리·고내봉수(高內烽燧)·애월연대(涯月烟臺)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애월진 내에는 군기 등의 건물 다수와 말을 점검하기 위한 사장(蛇場) 및 원장(圓場)이 설치되어 있다.

부기(附記)의 내용은 제주판관, 조방장 남해거(南海擧), 성정군(城丁軍) 245명, 목자와 보인이 181명, 말 1,040필이다. 애월진은 둘레가 549척이며, 성문은 남쪽과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 1개 봉수와 2개 연대를 관장하였는데, 고내봉수·애월연대·남두연대(南頭烟臺)이다.

[제주조점(濟州操點)]

1702년(숙종 28) 11월 15일 순력(巡歷). 제주읍성에서의 성정군(城丁軍)의 조련과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가중군(假中軍: 임시로 임명된 중군) 이항, 성장(城將) 4명, 치총(雉摠) 2명, 민호 7,319호, 전답 3,357결, 성정군(城丁軍) 1,263명, 창고의 곡식 30,040여 석, 향교의 제기(祭器)·제복(祭服)·서책(書冊), 군기(軍器)를 일일이 점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제주목의 편제는 읍 3리, 동면(東面) 34리, 서면(西面) 53리, 남면(南面) 5리 등 3면 95리이다.

제주읍성 안의 관아 건물의 위치가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어 당시 읍성 내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관덕정(觀德亭)·객관(客館)·옥(獄)·향교(鄕校)·서원(書院)의 위치, 그리고 서과원(西果園)·중과원(中果園)·남과원(南果園)·북과원(北果園)·별과원(別果園)의 위치 등이 명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읍성 밖 남쪽에는 모흥혈(毛興穴)·연무정(演武亭)·사직단(社稷壇)이 표시되어 있다.

[제주사회(濟州射會)]

1702년(숙종 28) 11월 18일 실시하였다. 활 쏘기 전에 관덕정 앞에 정렬해 있는 모습이다. 절제사 즉 제주목사, 중군 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 대정현감 최동제(崔東濟),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를 비롯해서 군관 15원, 주무(州武: 제주목의 무인 출신) 23원, 각 청의 관리들이 정렬해 있다.

관덕정 동 북쪽으로 제주목사의 동헌으로 통하는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가 있고 그 위에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매달려 있다. 본래 이 사장(射場)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1448년(세종 30) 제주목사 신숙청(辛淑晴)이 창건하였다.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 하여 ‘관덕(觀德)’이라 이름하였다. 관덕정이란 현판은 처음에는 안평대군이 썼다고 하나 현재의 현판은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이다.

현재 관덕정 내 두 개의 대들보에 가로 650㎝, 세로 50㎝의 작자와 연대 미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두보취과양주귤만헌(杜甫醉過楊州橘滿軒)」, 「상산사호(商山四皓)」, 「홍문연(鴻門宴)」, 「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 그것이다.

[제주전최(濟州殿最)]

1702년(숙종 28) 11월 17일에 실시하였다. 제주목사가 관하 각 관리의 치적(治績)을 심사하는 그림이다. 각 군대의 책임자 즉 당시 제주 지방의 군대는 크게 속오군(束五軍)과 마대(馬隊)로 구분되는데, 속오군은 3부(部) 6사(司) 30초(肖)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부의 책임자 천총(千摠), 각 사의 책임자 파총(把摠), 각 초의 책임자 초관(肖官), 마대(馬隊)의 책임자 별장(別將), 각 진(鎭)의 조방장(助防將), 성장(城將) 8명, 교련관(敎鍊官) 13명, 기패관(旗牌官) 94명, 도훈장(都訓長) 유학(幼學) 양유혁(梁維爀), 각면(各面) 훈장(訓長) 8명, 각면 교사장(敎射長) 22명, 강유(講儒) 302명, 사원(射員) 322명이 당시 천최(殿最: 공적 심사)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주읍성의 관아 건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관덕정 북쪽으로 우연당(友蓮堂)·영청(營廳)·상아(上衙)·망경루(望京樓)가 보이며, 이들 건물로 드나들기 위한 외대문(外大門)·중대문(中大門)·내대문(內大門)·후문(後門)이 차례로 나타나 있으며, 애매헌(愛梅軒)·군관청(軍官廳)·군기고(軍器庫) 등도 표시되어 있다. 관덕정 동남쪽으로는 제주판관과 관련된 관아 건물인 관청(官廳)·목관(牧官), 목관으로 통하는 외대문·내대문·군관청(軍官廳), 그리고 민가(民家)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

[제주양노(濟州養老)]

1702년(숙종 28) 11월 19일에 실시하였다. 제주목에 거주하는 80세 이상의 노인을 모시고 동헌 앞에서 치루어진 일종의 경로 잔치를 그린 광경이다. 동헌 뜰을 중심으로 망경루(望京樓)·마방(馬房)·귤림당(橘林堂)·애매헌(愛梅軒)·동헌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잔치에는 정의현감, 전대정현감 문영후, 전찰방 정희랑, 군관 15원 등이 참여하였고, 제주목에 거주하고 있는 노인은 80세 이상이 183인, 90세 이상 23인, 100세 이상 3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병담범주(屛潭泛舟)]

취병담(翠屛潭)에서의 뱃놀이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곳은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로 용연야범(龍淵夜泛)이라 하여 휘영청 밝은 밤에 용연을 찾아와 밤 뱃놀이를 즐겼다. 그래서 취병담에는 다른 명승지와 마찬가지로 제주목사·제주판관·유배인들이 풍류를 즐기다가 바위나 절벽에 유람의 흔적을 남긴 기념비적인 마애명(磨崖銘)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형상 자신도 이곳을 상당히 인상적으로 여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이형상 제주목사와 관련된 마애명은 확인되지 않으나, 그의 학문적 재능이나 풍류로 볼 때 마애명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마멸 또는 탈락된 것이 아닌가 싶다.

취병담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본 산의 지형이 상부 중앙의 백록담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그려져 있고, 취병담에 배를 띄워 놓고 기녀들과 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대천(大川) 우측에 민가의 모습, 용두암 부근에서의 목욕을 즐기는 광경, 연대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건포배은(巾浦拜恩)]

1702년(숙종 28) 11월 20일에 실시하였다. 향품문무(鄕品文武) 300여 인이 일부는 관덕정 앞에서, 다른 일부는 건입포(健入浦)에서 북쪽을 향해 즉 조정에 배례하는 모습과 제주의 각 마을에 있는 신당(神堂)이 불타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은 아마 이형상이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제주의 신당을 불태우고 사찰을 훼손한 것에 대해 도민들이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고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실제 당시 도민들의 정서는 그와 반대였겠지만, 이형상 제주목사는 신당(神堂) 혁파 자체를 커다란 업적으로 여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불타 없어진 신당은 129곳, 훼손된 사찰은 5곳이다. 무격(巫覡) 285명으로 하여금 농업을 본업으로 삼도록 조치하였다. 산의 형세 및 하천의 흐름이 상세하다.

[비양방록(飛揚放鹿)]

1702년(숙종 28) 10월 11일 사슴을 생포하여 비양도에 옮겨 방사(放飼)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무엇보다도 제주목 서면의 53개 마을 위치가 한 장의 그림에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주읍성의 서문에서 명월진에 이르는 지형을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해안의 지형, 봉수·연대의 위치, 애월진·명월진·토성(土城)의 위치가 잘 드러나 있다. 그 외 병문천(兵門川)·대천(大川)·무수천(無數川)·정자천(亭字川)의 흐름이 보인다. 비양도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음을 그림으로 강조하고 있다. 부기(附記)의 내용은 1702년 10월 11일 사슴을 생포하고 1703년 4월 28일에 비양도에 방사(放飼)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호연금서(浩然琴書)]

보길도(甫吉島)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서 호연한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며 책을 읽는다는 뜻의 그림이다. 앞의 「한라장촉(漢拏壯囑)」과 짝을 이루는 그림이다. 그림 좌측에 원당망(元堂望), 우측에 사라망(沙羅望)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중앙의 진성(鎭城)은 화북진성에 해당한다. 몇 척의 배가 별도포(別刀浦)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 당시 육지 지역과의 주요 통로는 조천포(朝天浦)[[館浦]보다는 별도포가 널리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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