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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173
한자 宋時烈
영어음역 Song Siyeol
이칭/별칭 우암(尤庵),우재(尤齋),문정(文正),영보(英甫),송성뢰(宋聖賚),화양동주(華陽洞主)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순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유배인
성별
생년 1607년(선조 40)연표보기
몰년 1689년(숙종 15)연표보기
본관 은진
대표관직 우의정

[정의]

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 아명은 송성뢰(宋聖賚)이다.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활동사항]

1689년(숙종 15) 1월,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후일 경종)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100여 일 동안 제주시 산지골 윤계득(尹繼得) 집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손자 송주석과 함께 『주자대전(朱子大全)』·『주자어류(朱子語類)』·역학 등을 강론하고,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나아가 축문을 올렸다. 또한 제주에서『의례통고(疑禮通攷)』를 썼다고 전한다. 송시열의 제주 유배 기간은 100여 일에 지나지 않았으나 제주 유림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

남인들이 다시 송시열을 국문하도록 청하여 서울로 압송되던 중 1689년 6월 7일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이 내려졌다. 1694년(숙종 20)에 관작이 복권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술 및 작품]

『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송서습유(宋書拾遺)』·『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정서분류(程書分類)』·『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심경석의(心經釋義)』·『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3번지에 있는 오현단 서쪽 암벽에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쌍벽으로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공경하고 배운다)’은 송시열이 쓴 글씨이다.1786년(정조 10) 제주 출신 변성우가 성균관직강으로 있을 때 성균관 북벽에 새겨져 있는 송시열의 글씨를 탁본으로 떠서 귤림서원에 주었다.

[상훈과 추모]

1695년(숙종 21) 제주 유학 김성우 등의 건의에 의하여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는데, 이때부터 귤림서원에 오현이 배향되었다. 오현단송시열의 적려 유허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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