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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007
한자 二-七鬪爭
영어음역 2.7 Tujaeng
영어의미역 February 7 Struggle
이칭/별칭 2·7 구국 투쟁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허호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총파업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48년 2월 7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48년 2월 1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성산면 신양리|오조리
관련인물/단체 남로당

[정의]

1948년 2월 남로당의 주도로 감행된 남한 단독 선거 저지를 위해 벌였던 전국 총파업 사건.

[역사적 배경]

1948년 1월 남북한 총선거안을 실현하기 위해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UNTCOK] 소속 대표들이 서울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에게는 폭넓은 역할과 권한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행할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예상 가능한 남북한 총선거가 불가능해졌을 때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이 취해야 할 대응책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소련의 거부로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의 북한 방문이 불가능해지자 남한만의 단독 선거 실시와 관련해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 대표들은 상당한 논란을 벌인 끝에 1948년 2월 6일 한국 문제의 유엔 소총회 상정을 결정하였다.

[목적]

1948년 당시 좌파 세력의 정치 노선을 주도하던 남로당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때 남로당에서 내세운 투쟁 슬로건은 9개 항으로 첫째,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을 실행하고자 하는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을 반대한다. 둘째,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셋째,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인에게 맡겨라.

넷째,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김성수 등 친일파를 타도하라. 다섯째, 노동자·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 보험제를 즉시 실시하라. 여섯째, 노동 임금을 배로 올려라. 일곱째, 정권을 인민 위원회로 넘겨라. 여덟째,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라. 아홉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만세 등이었다.

[발단]

1948년 2월 6일 한국 문제의 유엔 소총회 상정이 결정됨에 따라 남한 단독 선거안이 확실시되었다. 이승만 주도의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와 김성수 주도의 한민당 및 산하 단체들만이 남한 단독 선거에 대한 찬성 입장을 밝혔을 뿐,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사회 단체에서는 잇따라 반대 성명을 발표하면서 반발하였다.

민주주의 민족 전선도 2월 7일 “미 제국주의 및 국제 연합이 한반도의 분단을 고정화할 뿐 아니라 남조선을 식민지화·군사 기지화하려 하고 있다.”며 “전 조선인은 노동자 계급의 총파업을 선두로 위대한 구국 투쟁에 궐기해야 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로당은 2월 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이른바 ‘2·7 투쟁’을 실행에 옮겼다.

[경과]

1948년 2월 7일 새벽부터 전평 산하의 각 단위 산업노조를 시발로 전국 각 지역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철도, 전신, 전화, 체신 등의 각 부문을 비롯하여 공장, 광산, 사업소 등이 일제히 파업을 일으켰고, 부산에서는 선박 시위도 벌어졌다.

총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의 수는 전국적으로 30만 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에 의해 경찰관서 습격, 기관차 파괴, 전신주 절단, 교량 폭파 등도 잇따랐다.

제주 지역 경찰도 2월 7일부터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2월 8일에는 성산면 신양리와 오조리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신양리에서는 성산포 지서에서 출동한 경찰관들이 총을 발포하는 상황도 있었다. 이날 조천면 함덕리에서는 청년들이 도로 위에 장애물을 쌓아 교통을 차단하였다.

2월 9일에는 안덕면 사계리에서 경찰관 2명이 마을 청년으로부터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월 10일에는 한경면 고산리에서 마을 청년 300여 명이 지서 습격을 시도하는 바람에 경찰 측에서 총을 발포해 1명의 시위 군중이 총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조천, 하도, 대정, 삼양, 화북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삐라가 살포되기도 하였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2월 10일 성명을 통해 “해방 이래 조국의 소련화를 기도해 온 남로당 중심의 공산도배가 남조선의 치안을 파괴하고 질서를 교란함으로써 유엔 위원단의 업무를 방해하고 조선 독립을 불가능케 하고자 폭동을 일으켰다.”라고 발표하였다.

[결과]

1948년 당시 발표한 전국적인 피해 및 검거 상황을 보면, 사망 39명[경찰관 5명, 관공리 1명, 우익 5명, 폭도 28명], 부상 133명[경찰관 23명, 관공리 12명, 우익 63명, 폭도 35명] 등이었으며, 전국적으로 8,479명이 검거되었다. 2·7 투쟁 이후 2월 26일에 열린 유엔 소총회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유엔 소총회에서는 “조선 문제에 관한 1947년 11월 14일부 유엔 총회 결의와 동일 이후의 사태 진전에 비추어 소총회의 견해는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에게 가능한 조선 지역 내에서 동 결의 제2호에 규정된 사항을 실시하는 것이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의 임무”라고 결정함으로써 남한 단독 선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남로당은 조직력과 동원 능력을 과시하며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국내·외 세력들에게 타격을 주기는 하였지만, 유엔 결의안에 의한 단독 정부 수립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전국적으로 보면, 2·7 투쟁을 계기로 좌익 세력에 대한 대규모의 검거·투옥의 회오리바람을 몰고 와 남로당 조직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제주 지역에서도 2·7 투쟁 이후 남로당 탈퇴 성명이 탈퇴자 이름과 함께 잇따라 당시 유일한 지방지였던 『제주신보』에 발표되었다. 또한 1947년 3·1절 기념 시위 사건 이후 벌어졌던 검거 선풍이 또다시 불어 닥쳤다.

1948년 3월 12일자 미군 정보 보고서에서는 ‘지연된 보고’라는 단서를 달아 제주 지역에서 2월 9일부터 2월 11일까지 사흘 동안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고 하면서 “이들 폭동은 경찰지서 6곳 습격, 삐라 살포, 칼과 곤봉으로 무장한 군중 시위였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 국가를 부른 것이 주목된다. 보고된 사망자는 없으나 경찰 2명이 심하게 구타당했다. 그 3일 동안 경찰은 290여 명을 체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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