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조선의 역사가 숨쉬는 규암마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003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조선/조선
집필자 이행묵

[정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 규암마을의 이야기.

[역사 속의 규암마을]

규암마을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부여읍을 마주한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 있다. 부여의 진산에 해당하는 부소산을 돌아 구드래나루를 지나는 물줄기가 부여읍규암면을 가른다. 서쪽으로 가로 놓여 있는 백제교를 건너면 자온대를 지나 규암마을에 이른다. 이러한 백마강자온대에 다하여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썼다. “공주의 서남쪽은 부여인데, 백마강에 임한다. 곧 백제의 고도로서 조룡대, 낙화암, 자온대, 고란사 등이 다 백제의 고적들이다. 강에 임한 암벽은 기이하고 그 경치가 수려하여 절승이다. 또 토지는 비옥하고 부유한 자도 많다. 그러나 도읍으로 논한다면, 평양이나 경주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비좁은 편이다.” 이처럼 규암마을백마강의 절승지에 해당하는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백제 시대부터 시작하여 조선 시대까지 부여의 역사를 품은 마을이다.

규암마을의 경관을 보면, 오랜 세월 백마강의 범람원이 다져 놓은 들판은 마을 앞으로 끝없이 펼쳐져 부여군 최대의 곡창 지대로 손꼽히는 규암평야를 만들어 놓았고, 금강의 수로와 부여 주변의 육로 교통이 만나는 길목이라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사람과 물산이 집결되는 부여의 관문이기도 하다. 동쪽으로는 석성과 논산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구룡, 내산, 외산을 지나서 보령과 서천의 서해안으로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외리를 경유하여 장암과 임천으로 연결되며, 북쪽으로 은산과 청양으로 이어진다. 수운이 활성화되어 규암나루를 통하여 금강 수로의 유력한 거점으로서 강경을 거쳐 한양으로 통하는 바닷길이 되기도 한다.

규암마을을 상징하는 명승고적은 부여의 팔경으로 언급되는 자온대(自溫臺)가 있다.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바위가 강물에 우뚝 선 자온대는 속칭 ‘엿바위’라는 이름이 있다. 누군가 몰래 엿보는 것처럼 머리만 조금 내미는 모습이라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당나라가 사비성을 침공할 때 자온대에 숨어서 엿보던 초병이 사비성에 알렸다는 사연이 있다. 강물을 향하여 돌출된 석벽에는 우암 송시열의 친필로 전하는 ‘자온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사비 절벽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10여 인이 앉아 있을 만하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하어 갈 때 먼저 이 돌에 올라 부처에게 절을 했는데,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이름을 난석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도 동일한 내용으로 확인된다. “백제의 왕이 이 바위에서 놀면 바위가 자연히 따뜻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하였다”라고 전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의자왕이 일찍이 이 바위에 놀러 오면 간신배들이 먼저 불을 질러 따뜻하게 하였다”고 속설을 전하기도 한다.

규암마을의 또 다른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는 수북정(水北亭)이 있다. 자온대 위에 건립된 수북정백마강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누각이다. 누각에 오르면 부산이 물 위에 홀로 떠있는 듯 멀지 않게 보이고, 부소산의 아스라한 모습도 손사래친다. 남쪽으로는 백마강의 풍경이 푹 빠지게 된다. 수북정은 본래 광해군 연간 양주목사를 지낸 김흥국[1557~1623]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장소였다. 당시 김흥국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궁궐에 가두는 정치 과정을 거치면서 이를 통탄하고 있었다. 이에 김류와 이귀 같은 인조반정의 주모자들이 김흥국에 참여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이를 간곡하게 물리치고 관직을 버렸다. 부여 규암리로 낙향하여 백마강의 초옥에서 숨어 살고 ‘수북정’이라는 편액을 자신의 자호에서 따서 붙였다.

[잊혀진 규암마을 사람들의 추억, 오일장과 규암나루]

부여는 금강을 끼고 있다. 부여는 금강을 빼놓고 지역 사회를 말할 수 없다. 금강은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지, 편리한 수운을 규암마을 사람들에게 제공하였다. 규암마을은 교통이 발달한 곳으로서 쌀, 면화, 어물, 소금이 다수 거래되는 곳이었다. 이러한 입지 조건 때문에 다수의 장시가 발달하였다. 부여군 지역 내에서는 활발한 교역이 규암마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금강 하류에 입지한 규암나루는 부여 지역을 대표하는 나루터로서 부여읍규암면을 잇는 요충지였다. 강 서쪽에 자리한 내산, 은산, 홍산, 외산, 보령, 청양 등을 왕래하려면 반드시 규암나루에서 물길을 건넜고, 반대로 부여, 논산, 공주 방면으로 가려면 규암나루를 경유해야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저산팔읍을 위시한 오일장이 크게 활성화되면서 규암나루는 이웃한 홍산장, 은산장, 그리고 강경포구를 잇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 부여현의 조세를 상납하기 위한 창고인 부여의 해창과 홍산현의 세곡 창고인 홍산창이 모두 자온대 옆에 있었던 사실을 통하여 규암나루가 국가의 물류 유통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규암나루가 번창하는 과정은 규암마을 사람들의 생활사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규암나루 근처에 자연스럽게 장시가 형성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해방을 전후하여 규암장의 물동량과 유동 인구가 부여읍의 읍내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규암나루가 부여 지역의 물산을 모으고 분산시키는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을 통하여 올라온 외부 물품은 규암나루에서 부여 지역 내 장시로 이전되었고, 부여 지역의 물산은 규암나루로 모여 금강 수운을 통하여 외부로 운송되었다. 규암장이 열리는 3일과 8일이면 각지에서 몰려두는 보부상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거래되는 물건들은 주변의 오일장으로 퍼져 나갔다. 증언에 따르면 규암장은 쇠전, 모시전, 포목전, 싸전, 어물전이 있었다고 하며 이외에도 일용잡화와 채소, 과일, 옷 등이 거래되었다. 한때는 군산과 강경을 잇는 정기 여객선이 규암나루까지 운행되기도 하였다. 규암나루와 규암장이 번성하던 규암마을은 1945년 이전에도 가구 수가 200여 호가 넘는 대촌이었다. 당시 부여군에 속한 단일 행정리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규암나루 주변에는 외지에서 온 장사꾼을 상대로 식당, 선술집이 즐비하였고 하숙집, 요정, 정육점도 성행하였다고 한다.

규암나루와 오일장의 전통은 해방 이후에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육상교육이 발달하면서 나루터의 기능은 유명무실해졌다. 부여읍의 급속한 팽창으로 상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기존의 오일장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 1968년 부여군의 숙원 사업이었던 백제대교가 준공되면서 규암나루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번성하던 오일장 역시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고 지금은 과일과 채소만 소규모로 거래하는 장시로 바뀌었다. 지금의 규암나루에는 부여를 찾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유람선이 운행 중이다.

[규암마을의 형성]

규암마을의 역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금강 하류에 위치한 입지 조건과 주변 지역에서 석기 시대 유물이 수습되면서 오래전부터 인류가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규암마을의 형성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특정 성씨가 집성촌을 이룬 적이 없다는 점이다. 가령 입향조에 얽힌 일화나 토성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아마도 조선 후기 이래 장시가 번성한 규암나루가 있었기 때문에 거주민의 이동이 빈번한 데다가, 홍수가 나면 잦은 침수를 당하는 등 거주지로서 불리한 입지 조건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암마을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성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김흥국의 순천 김씨가 있고 이외에 김해 김씨, 영순 태씨, 양천 최씨 등도 유력한 성씨로 부각되었다.

순천 김씨의 김흥국규암마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고 자온대에서 은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전부터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외직으로 한산군수를 지낼 때 은거할 거처를 점지하여 두었다고 한다. 따라서 순천 김씨가 규암마을 주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17세기 후반 이후이다. 규암마을에서 가장 많이 세거하는 문중은 김해 김씨이다. 대체로 19세기 초중반에 입향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해 김씨는 일제 강점기 규암노동조합의 위원장, 해방 이후의 규암면장, 도의원 등을 배출한 지역 유지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영순 태씨도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에 사업을 통하여 유력한 성씨로 자리 잡고 초대 면의원과 초대 군의원을 배출한 가문이다. 이에 반하여 양천 최씨는 서울로 가는 조세곡은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대부분 외지로 이거하면서 부여 지역 내에는 몇 집 살고 있지 않다.

[규암마을의 마을사]

규암마을이 속한 규암리는 조선 시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규암리가 행정 지명으로서 처음 등장하기 시작된 것은 행정 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진 1914년이다. 규암나루와 같은 ‘규암’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지만 동리명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후기 각종 지리지를 보면 규암리는 창리(倉里)라고 기재되어 있다. 창리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에 부여현의 해창과 홍산현의 홍산창이 규암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쉽게 추정할 수 있다. 1872년의 기록에 따르면 청풍청 옆에 “본읍 세창이 관문에서 서쪽 5리에 있다”라고 기재된 것이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부여현의 사창은 81칸의 규모였고, 부여현의 해창은 34칸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규암리부여현 내에서 창고가 다수 위치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규암’ 또는 ‘엿바위’란 지명이 그 이후에 유래된 명칭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도 창리와 더불어 ‘규암’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 일제 초기에 해창과 홍산창이 폐지되면서 남아 있던 ‘규암리’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는 규암면의 소재지가 되면서 규암마을의 마을사에서 가장 흥성하였던 시기이다. 부여의 물산이 집중되었던 오일장과 강경포구를 잇는 금강의 수로로서 규암나루의 기능이 절정을 맞이하였다. 부여와 보령을 연결하는 신작로가 규암나루를 경유함으로써 규암마을은 수로뿐만 아니라 육상 교통의 요충지로도 빼놓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규암마을은 명실공히 부여의 행정, 교육, 상업, 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마을 내부에 우체국, 면사무소, 주재소를 비롯하여 각종 학교와 야학, 교회 등의 주요 시설이 개설되는 눈부신 성장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규암마을이 주목받은 배경에는 식민자 수탈을 위한 거점으로 규암나루가 이용된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수운을 이용한 물자 수송의 후방 기지로서 규암나루가 위치하였고, 규암마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여지소가 들어서 있었다.

일제 초기 충청남도 지역의 기독교 성결교회의 발상지가 바로 규암마을이라는 사실은 빼놓을 수 없는 마을의 중요한 역사이다. 가장 선구적인 인물이 지역의 토호인 김성기였다. 김성기는 1912년 봄 향리인 규암 돌말로 낙향하여 고향에 교회가 없음을 한탄하고 몇 사람의 구도자를 모아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1912년 10월에는 동양선교회 선교사 토마스가 전도관 설치를 위하여 서울에서 강경을 거쳐 규암마을을 방문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김성기의 집에서 20리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마침내 이듬해 개인집을 매입하여 규암전도관이 문을 열었다.

[규암마을의 산신제와 거리제]

규암마을에는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사흘과 초나흘에 산신제와 거리제를 지냈다. 산신제는 할아버지 당산으로 일컬어지는 자온당산과 할머니 당산에게 각각 제사를 지내는데, 자온당산 산신제는 정월 초사흘 저녁에 지내고, 할머니 당산에게는 초나흘 오전에 제사를 지내고서 정오 무렵 거리제가 거행된다. 규암마을 산신제와 거리제의 유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단지 마을 어른들은 옛날부터 마을의 평안과 액운이 없기를 축원하기 위한 마을의 오랜 전통으로 증언할 뿐이다. 일부 마을 주민들은 예전에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하는 제기가 있다는 점, 백제 왕과 관련된 자온대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매우 오래전에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규암마을의 산신제 유래는 마을에서 구전되는 것과 같이 옛날에 혹독한 돌림병의 창궐이나 흉년 재해, 호환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규암마을의 산신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김을 받는 산신의 신격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산신이 내외지간으로 인식되는 것은 충청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은 사례인데, 전통적인 음양 및 방위 관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제례 의식 속에 깃들어 있는 산신제와 거리제의 성격이 유교식 정숙형 제의라는 점이다. 일부 불교적인 요소가 가미되기도 하였으니 기본적으로는 유교식 동제이다. 셋째는 자연 마을 단위에서 무속식 제의를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규암나루와 오일장, 그리고 규암을 터전으로 살던 무당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규암마을이 한때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비용 마련을 위한 시장 상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뒷받침되었다. 넷째, 산신제와 거리제가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왔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 이르면서 생활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를 겪으면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다수 부활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롭게 복구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동제의 변화 과정은 곧 규암마을 사람들이 누린 삶의 고락을 함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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