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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04
한자 百濟復興運動
영어공식명칭 The Restoration Movement of Baekje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양기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660년 8월 - 백제부흥운동 나당 점령군의 행패로 백제 유민들이 격분하여 발단
발생|시작 시기/일시 660년 8월연표보기 - 백제부흥운동 발생
전개 시기/일시 660년 8월 26일 - 소정방 임존성 공격 실패
전개 시기/일시 663년 6월 - 풍왕이 복신 살해
전개 시기/일시 663년 8월 17일 - 백제부흥군과 왜군이 백강구 전투에서 대패
전개 시기/일시 663년 9월 7일 - 주류성이 나당 연합군에 함락
전개 시기/일시 663년 11월 - 임존성 함락
종결 시기/일시 663년 11월연표보기 - 백제부흥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사비 남령 -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 산83번지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임존성[현 봉수산성]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마사리 산28
종결 장소 임존성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 봉수산성
성격 국권 회복 운동
관련 인물/단체 복신|도침|흑치상지|부여풍|부여융|소정방|유인궤

[정의]

660년부터 663년 동안 백제 유민들이 멸망한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던 운동.

[역사적 배경]

백제 의자왕이 항복을 하자 나당 연합군은 왕도 사비도성과 북방의 웅진성을 점령하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고토를 지배하려 하였다. 나당 연합군은 사비도성에 들어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였으며, 특히 항복한 의자왕에게 굴욕을 강요하는 등 온갖 행패를 자행하였다. 격분한 백제 유민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도성을 탈환하고 왕통을 잇기 위하여 백제 전역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사비, 지금의 부여 지역이다. 유민들이 660년 8월 초부터 사비 남쪽인 남잠에 목책을 세우고 나당 연합군에 처음 대항하였으며, 그 밖에 정현성,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는 좌평 정무(正武)가,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는 달솔 여자진(餘自進)이, 임존성[현 충청남도 예산군 봉수산성]에서는 복신(福信)도침(道琛),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중심이 되어 나당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 핵심적인 인물이 복신도침이다. 백제부흥운동은 주류성(周留城)과 임존성을 주요 거점으로 660년 8월부터 663년 11월까지 3년 가까이 전개되었다.

[경과]

백제부흥군은 초기에는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대표적인 전투가 임존성 전투, 사비성 부근에서의 전투, 웅진강구 및 두량윤성 전투 등이다. 백제부흥군 3만여 명이 참여한 임존성은 복신이 지휘하고 있었으며, 초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었다. 660년 8월 26일 임존성을 공격하여 온 당의 소정방(蘇定方)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기세를 높였고, 기세에 200여 성이 백제부흥군에 호응하였다. 복신이 거느린 부흥군은 두량윤성에서 신라군의 공격에 맞서 한 달여 동안 싸워 성공적으로 막아 내었다. 두량윤성 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이 승리하자 백제부흥군의 위상이 높아졌고, 백제부흥군의 각 세력들은 복신도침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임존성 전투와 두량윤성 전투에서 승리한 복신·도침은 곧바로 끊어진 국맥을 잇기 위하여 백제 왕조의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복신은 660년 10월 왜에 사신을 보내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백제부흥군은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하고 국가 통치에 관한 사항을 풍왕에게 맡겼다. 정통성을 지닌 국왕이 즉위함에 따라 망한 백제가 새로운 왕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므로, ‘부흥백제국’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백제부흥군은 외형상 끊어진 백제를 다시 잇는 부흥국의 군대를 갖추고 왕도를 임존성에서 주류성으로 옮겼다. 적어도 외형상 왕국에 걸맞은 국가체제를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단계로 백제부흥군은 사비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에게 공급되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당군을 고립무원 상태로 빠뜨려 스스로 백제 고토에서 물러나게 하는 작전이었다. 이에 나당 연합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백제부흥군과 전투를 재개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 전투는 662년 7월에 벌어진 지라성·급윤성·대산책·사정책 전투, 662년 8월에 벌어진 진현성 전투 및 내사기성 전투, 663년 2월에 벌어진 거열성·거물성·사평성 전투, 그리고 덕안성 전투 등이다. 백제부흥군은 나당 연합군의 거센 공세에 밀려 웅진 동쪽과 후방 기지 역할을 하는 남방 지역을 거의 상실하고 웅진 서쪽에 국한될 정도로 위축되었다. 불안을 느낀 풍왕은 수도인 피성(避城)[현 전라북도 김제시 성산]을 버리고 주류성으로 환도하면서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결과]

백제부흥군은 뜻하지 않게 내분이 일어나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발단은 백제부흥군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양대 축인 복신도침 사이에서 일어났다. 661년 3월의 웅진강구 및 두량윤성 전투 이후 복신도침을 살해하였고, 이어 663년 6월 풍왕복신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신의 죽음으로 백제부흥군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러한 내분을 파악한 나당 연합군은 663년 9월 총공세를 가하였다. 위기에 처한 풍왕은 왜와 고구려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왜는 배 1,000척과 원군 2만 7000명을 파견하여 백제부흥군을 도왔다. 663년 8월 17일 나당 연합군 수군이 왜 수군과 백강구에서 큰 전투를 벌여 왜선 400척을 불태울 정도로 크게 승리하였다. 이어 663년 9월 7일 주류성을 함락하고, 663년 11월 저항하고 있던 임존성마저 함락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의의와 평가]

백제 멸망과 백제부흥운동은 당, 신라, 백제, 왜 등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참여한 국제 전쟁이었으며, 성패가 이후 전쟁에 참가하였던 국가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더불어 한국 고대 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국권 회복 운동의 성격을 지녔다. 백제부흥운동으로 당의 한반도 지배 정책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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